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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 Apr 01. 2017

히든 피겨스 : 벽을 넘어서

우주의 벽과, 당연함의 벽을 넘어선 세 여성의 비하인드 스토리.

오래간만에 영화다운 영화를 볼 기회가 다가왔다. 우주로 잘 포장된, 그러면서도 매우 간결하며 이해가 쉬운 메시지를 던지는 그런 영화다.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에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이 시작되면서, NASA에서 활약한 세 여성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당연한 일들 조차도, 인류가 우주에 진출하는 초입에는 모든 것이 생소했을 것이다. 그런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우주비행사들의 화려한 모습 속에 감춰진 숨은 이야기를 찾아보자.

알고 보면 더 재밌을 몇 가지 이야기들


영화를 보기에 앞서서


<히든 피겨스>는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 그리고 우주 개척사에 관한 몇 가지 상식을 미리 알고 보면 즐거울 것이다. 50년대에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미국과 소련은 곧 다가올지 모를 핵전쟁에 대한 우려가 컸었다. 특히 미국은 소련을 구시대적인 농업국가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적 인식이 퍼져있었다. 하지만 1957년, 소련이 먼저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불안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능력은 적국의 상공에 핵탄두를 언제든 보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미국은 소련의 핵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 듯한 심리적 타격을 받은 셈이다. 이에 1958년, 미국은 여러 조직으로 흩어져있던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NASA 설립을 통해 통합하여 추진한다. 그런 NASA는 당시 미국인들에게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 선망의 대상이었고,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원할 희망이었던 셈이다.


<히든 피겨스>의 배경은 1961년 무렵이다. 최초의 인공위성 타이틀은 소련에 빼앗겼지만, 최초의 우주비행사 타이틀만큼은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모든 미국인들이 NASA를 응원하던 시기이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이렇게 출발한다.



머큐리와 7인의 영웅들


NASA는 최초의 유인 우주선, <머큐리>를 계획한다. 지금으로 치면 작은 드럼통에 불과한 우주선이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력의 결정체인 셈이다. 일곱 명의 우주비행사 후보가 선발되었고,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서 국가적인 영웅이 된다. 그러나 영웅들에게 주어진 것은 미사일에 올려진 작은 드럼통과, 계산이 끝나지 않은 복잡한 궤도 계산식뿐이었다.


각 군의 최정예 파일럿들이 모여서 <머큐리 7>이 된다. 이들 중에서 한 명은 우주로 가지 못했다.


히든 피겨스, 숨겨진 3인의 영웅들


우주비행사들을 우주로 보낸 숨은 공로자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공로자 중에서도 특별한 공통점이 있는 세 명의 여성들을 골라서 포커스를 맞춘다. 설립된 지 고작 삼 년에 불과한 NASA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부족한 상태였다.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 곳이라는 인식과 달리, 사회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관습들이 고스란히 옮겨와서 조직의 유연성을 저해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은 그런 점에서 특별하다. <당연한 것들>을 뛰어넘는 용기를 보여줬고, 그로 인해서 NASA가 우주비행사를 무사히 우주로 보냈다가 돌아오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은 3+1


영화 속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또 있다. 조연으로 나오는 셈이지만, 주연 여배우 세 명에 버금가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 인물은 <당연함>을 극적으로 반전시켜서 <또 다른 당연함>을 창조한다. 물론 다른 여러 조역들 중에서도 이런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인물 간의 갈등과 봉합, 그런 것이 매우 매끄럽게 전개된다.



불타는 드럼통


모르고 무심결에 넘어가면 이 영화의 묘미 한 개를 놓치는 셈이다. <히든 피겨스>는 과학기술적 측면에서 매우 사실성이 높고, 고증이 잘 된 영화다. <마션> 수준에는 근접하고, <그래비티>보다는 리얼리티가 더 높다. 설마 <인터스텔라> 같은 본격적인 SF 판타지물을 대입하진 말자.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머큐리 우주선>은 고작 1.4톤으로, 당시 소련이 쏘아 올린 첫 우주선의 4.8톤에 비해 턱없이 작았다. 이것은 당시 미국의 기술력이 크게 뒤떨어지는데서 기인한다. 심지어 안전하게 대기권 재진입을 하는 방식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우주선은 지금과 달리 매우 높은 각도로 재진입한다. 마치 ICBM처럼 내리 꽂히는 셈이다. 덕분에 우주선은 극심한 마찰열과 압력을 받게 되며, 우주비행사는 최대 12G에 육박하는 극심한 G-Force를 견뎌야 했다. (요즘은 최대 6~8G에 불과하다)


<히든 피겨스>는 어떤 점에서 우주재난 영화인 <아폴로 13>과 흡사한 면이 많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이고, 위기에 처한 우주비행사가 등장한다. 히든 피겨스의 시점에서 고작 9년 후가 아폴로 13의 시점이다. 모든 것은 연속선상에 있던 일들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머큐리 우주선은 불타는 드럼통에 가깝다. 제정신의 우주비행사라면 아무도 탑승하지 않을 것이다.



레드스톤과 아틀라스


영화를 관통해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둘 모두 탄도미사일 모델명으로, 초기 우주개발 당시에 ICBM과 우주선 발사체의 구분이 없었기에 발사체로 사용되기도 했다.

(좌측부터) 차례로 발사된 7대의 머큐리, 초기 두 대는 레드스톤이다.

레드스톤은 최초로 실용화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일종이다. 갑자기 소련이 우주로 1톤이 넘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 위기감에 몰린 미국은 유인우주선 경쟁을 치르게 된다. 그런데 쏠 로켓이 없는 거다. 모두 개발 중이어서 실용화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소련은 벌써 몇 톤짜리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도 남을 거대한 로켓을 보유하고 있었다. 임기응변으로 이미 군대에 배치되었던 <레드스톤> 지대지 미사일을 가져다가 폭탄을 떼어내고, 대신에 작은 캡슐을 부착한다. 그것이 바로 <레드스톤-머큐리>, 미국의 첫 유인 우주선이 된다. 레드스톤은 ICBM급에도 턱없이 부족한 로켓이었기에, 우주선을 제대로 된 위성궤도로 올릴 수 없었다. 1.4톤의 우주선을 고도 187km, 최대속도 2.8km/sec까지 가속시킨다. 현대적 의미로는 <서브 오비탈 : 준궤도 비행>에 머문다.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호는 4.8톤의 무게로 고도 300km 넘게 상승했으며, 속도는 무려 7.8km/sec였다. 그 뒤에 발사된 미국의 레드스톤-머큐리보다 열 배 이상 강력했다고 봐야 한다.


아틀라스는 처음부터 ICBM으로 개발된 녀석이다. 소련이 보유한 거대한 로켓, R-7은 1957년 이후로 몇 년째 우주를 주름잡고 있었다. 미국의 <아틀라스> ICBM은 기술적으로는 꽤 진보적이었지만, 여전히 운반능력은 R-7보다 한 수 아래에 그쳤다. 그렇지만 1.4톤짜리 작은 우주선을 300km 이상의 고도에서, 7.8km/sec까지 가속시킬 수는 있다. <아틀라스-머큐리>를 통해서 미국은 드디어 본격적인 우주여행을 시작한다.


미국과 구소련 모두, ICBM에 폭탄 대신 사람을 태워서 우주를 정복했다.



화장실


영화 속에서 차별과 선입견의 상징처럼 부각된 명소이다. 그 화장실이 어떻게 유지되었고, 어떻게 무너지는지가 이 영화의 가장 클라이맥스라고 할 것이다. 사실 화장실이 극복되는 것은, 그나마 가장 엘리트 인재들이 모였던 진보적인 분위기였기에 가능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너무나도 당연한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여성 차별, 유색인종 차별이 이뤄졌었다. 스스로 평등주의자라 여겼던 이들 조차도, 태어나서 경험하고 배워온 <당연함>이, 사실은 편견과 차별이 섞인 것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하지만 <그>는 그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화장실로 간다. 이 화장실을 위해서 영화 속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지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 모순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이는,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다.




총평 : 공대생 남친과, 문대생 여친이 손잡고 보기 좋을듯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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