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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 Nov 18. 2017

글쓰기 잘하는 비법

잘 쓴 글과 좋은 글은 다르다

간혹 보면 '글쓰기 잘하는 법', '글쓰기 특강' 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거의 사라진 지금, 왜 젓가락질과 마찬가지인 글 쓰는 방법을 배우려고 할까. 물론 글 쓰다 보면 더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길 수 있다. 그렇지만 젓가락질을 아무리 우아하게 해봐야 젓가락질일 뿐이다. 글쓰기 역시 잘 써봐도 똑같은 글이고.


사람은 뇌과학적으로 어떤 문장을 보면 단어 하나하나 세분해서 보지 못한다. 전체적인 맥락부터 파악한다.


중등 교육만 제대로 마친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사를 글로써 충분히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 간혹 문법에 어긋나거나, 문장 구조가 허술해서 엉뚱한 뜻으로 곡해될 수 있는 조잡한 글일지라도, 적당한 이해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다. 뜻을 대충 이해하고서는 상대방의 빈약한 글솜씨를 조롱하는 건 다른 문제다.


흔히 '글을 잘 쓴다'라는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문법과 구조, 전개에 익숙한 이들이다. 맞춤법도 나무랄 데 없으며, 글의 맥락을 매끄럽게 정리해서 알아보기 쉽게 쓴다. 그게 전부다. 그럼에도 '글을 잘 쓰는 것 = 좋은 글을 쓰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창의력을 키우는 글쓰기'라는 강연이 유행이던 시절도 있는데, 완전 사기극이다. 창의력과 글쓰기가 무슨 상관인가?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글쓰기 필살 비법


오래전, 유시민 작가의 글쓰기 특강 중에서 어떤 말이 기억난다. "사실 글쓰기 잘하려면 무조건 많이 쓰면 되긴 해요." 재밌는 것은 여느 작가들도 똑같은 말을 한다는 점이다.


다독 - 다작 - 다상량, 글쓰기의 3대 덕목은 현대적으론 잘못된 표현이다.


모든 글쓰기 강연에서 바이블처럼 등장하는 항목이다. 다문-다독-다상량-다작. 이 말을 처음 내뱉은 송나라의 구양수는 처음에 '다문 다독 다상량'이 글짓기의 비법이라 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살짝 '다문 -> 다작'으로 변했지만 근본 뜻은 비슷할 것 같다.


과거에는 글쓰기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로, 기본적인 글쓰기 능력이 갖춰졌기에 무슨 글을 써야 하는지 문제가 관건이었으리라. 그들이 말한 글쓰기는 '좋은 글을 쓰기'가 아니었을까. 반면에 작금에는 모두가 쉽게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독자와 작가의 경계가 명확하지도,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글을 읽기만 해도 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어떤 특정 형식의 글은 무조건 많이 써야 익숙해진다. 젓가락도 늘 쓰던 젓가락 아니면 어색하듯, 보고서 작성의 대가 조차도 흔한 시구 쓰라면 처음엔 버벅거린다. 문장력 쩐다는 시인 조차도 대입 자소서 써보라면 낙제점 받을지도. 글짓기와 글쓰기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글을 짓는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쓰는 이가 무슨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타인에게 이야기할지 정하는 작업에 가깝다. 글쓰기는 그 생각을 문자로 나열하는 후공정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글쓰기는 너무 다양해서 모든 영역에 통달하기 어렵다. 각자 자신이 써야 할 내용에 맞는 글쓰기 실력 연마가 필요할 뿐이다. 그냥 많이 쓰면 된다.



글쓰기의 방법이 넓어졌다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일주일에 몇 번이나 글을 써야 하는가. 회사에서는 보고서나 시말서(?), 학생은 과제물이나 리포트... 그런데 잊고 있는 글쓰기가 있다. 매일 수없이 카톡 날리고, SNS로 떠들지 않는가? 요즘은 직접 말로 떠드는 시대가 아니라, 글로 수다 떠는 시대가 되었다.


굳이 그럴듯한 글쓰기만이 전부는 아니다. 카톡의 단문, 이모티콘도 따지고 보면 원초적인 글쓰기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문법과 형식을 고집하는 이들이 조금 이해가 안 된다. 위에서 말했듯, 사람은 대충 써도 귀신같이 상대의 글 내용을 알아볼 수 있다. 형식은 오로지 인간이 만든 규칙일 뿐이다.


반면에 이모티콘은 역사가 아주 깊은 의사소통 수단이다. 혹시 픽토그라피(그림문자)를 들어봤나? 최초의 문자라는 수메르 설형문자보다 수백 년 먼저 등장했었다. 현대인들이 봐도 그 뜻이 대충 이해될 정도니, 이모티콘의 원형은 아닐까. 심지어 이모티콘은 아주 함축적으로 기분, 상황, 의사전달이 풍부하게 가능하다. 정해진 규칙에 얽매인 구닥다리 문자보다 훨씬 미래적인 전달수단이라고 생각해보신 분?


요즘 유행하는 '초성어' 조차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어떻게 저런 신박한 의사전달 수단을 생각했을까. 그건 문자의 퇴행이 아니라, 진화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상상력에 한계를 두지 말자.



좋은 글감을 찾기 어려워진 이유


다문, 다독, 다상량... 정말 좋은 말이다. 타인과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지 못했던 좋은 소재를 찾기도 한다. 또는 책을 많이 읽고 사상의 지평을 넓힐 수도 있다. 혼자 독방에 갇혀 '나만의 세계'에 집중하다 보니, 인간 본연의 숭고한 의미를 되찾고 명작을 쓴 인사들도 널려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다. 쏟아지는 정보를 정리하는 데도 두뇌는 정신없이 돌아간다. '석줄 요약'이 그래서 출현했다. 더 이상 긴 글은 인기가 없다. 왤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심혈을 기울인 내 글'에 관심 기울여줄 한가한 시간이 사람들에겐 없기 때문이다. 웹툰-웹소설 같은 스낵 컬처가 대세로 자리 잡은 이유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바쁜데 언제 긴 글 읽고, 복잡한 문학 서적 붙잡고 있으랴. 지하철에서 잠깐 짬 내서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고 자극적인 글만 읽게 된다. 어떤 뉴스가 있으면 충분한 검토보다는, 누군가 믿을만한 이가 대신 결론 내려 준 '석줄 요약'을 금과옥조로 믿고 행동한다.


여전히 좋은 글은 긴 글이 태반이다. 짧으면서 좋은 글은 쓰기도 어렵고, 관점도 한정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글은 매우 짧다. 카드 뉴스식으로 명확한 그림을 넣고, 간단한 설명글만 붙이는 방식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그곳에서 발생한다. 읽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설명과 자의적인 판단의 기회를 주지 못한다. 주입식 급속 정보전달에 그치기 쉽다.


대부분의 평범한 대중은 그런 주입식 간단 글에도 충분히 취사선택하여 필요한 것만 골라낼 수 있다. 반면에 여전히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는 '21세기 원시인들'도 존재한다. 그런 이들에게 무차별적인 요약글은 독이 되곤 한다. 여태껏 역사상 한 번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계층이, 이제는 집단지성의 석줄 요약에 기대어 큰 세력을 차지했다.


최근에 '아폴로 음모론', '지구 평평설'이 급속히 퍼지는 이유는 뭘까? 과학 지성의 산물인 인터넷이 오용된 탓은 아닐는지.


앞으로 좋은 글을 쓰려는 이들은 변화된 세태를 충분히 살펴야 한다. '좋은 글'은 특정 지식층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된다. 바빠서 글 읽을 시간이 부족한 다수에게 쉽게 전파될 수 있도록 짧고, 명확하면서도, 내용이 좋아야 한다. 한번 생각해보라. 그런 글감 떠올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20세기 문인들이 부럽더라. 짧은 시를 써도 그걸 충분히 감미해줄 시간 많은 이들이 넘쳐났고, 긴 글에 글솜씨 부려봐도 멋있다고 칭찬하는 이들 많았다. 이제 그런 독자는 대형서점에나 가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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