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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련작가 Oct 02. 2024

사유와 자아와 시간과 공간과 순간과 영원

전쟁의 참화 소식이 많이 들린다. 이는 앞으로 더 심화할 것이다. 주역에 따른 내 점괘도 그렇거니와, 멀리 우편으로 소식을 전한 차라투스트라의 점성술에 따른 점괘도 그렇단다.


‘나’의 중함, ‘너’의 중함, ‘우리’의 중함은 道에 따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유혈이 낭자했던 전국시대에 목이 터질 정도로 처절하게 외친 진리다. 하지만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타인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한 사회 집단이 다른 사회 집단을 위력으로 짓누르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하나의 민족이 타민족을 짓밟는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


故為是舉莛與楹 厲與西施

恢恑憰怪 道通為一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毀也

凡物無成與毀 復通為一

唯達者知通為一

為是不用而寓諸庸

庸也者 用也 用也者 通也

通也者 得也 適得而幾矣

因是已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전국시대 여기저기 알린 제물론의 일부다. 작은 것과 큰 것, 아름다운 것과 미운 것은 道를 통해 하나가 된다는 것. 모든 것은 하나의 道에서 분열해 나온 사물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모든 사물은 성립과 파괴를 떠나 道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 오른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르면 몸 전체를 잃는다는 것. 그리해서, 모두는 한 몸임을 알고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우리는 이토록 단순한 황금률을 왜 지키지 못할까.


이는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가짜 자아’ 때문이다. 사람의 골절과 아홉 개의 구멍과 여섯 가지의 내장을 근본으로 하는 그것. 마주하는 사건에 따라 유기체가 만드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탄식, 변덕과 두려움, 뽐냄과 허세. 그 사유로부터 생긴 ‘나’가 변하지 않고 지속될 것이란 집념이 문제다. 언어와 사유로의 ‘가짜 나’가 실체가 있다는 착각.


습한 물가에서 해충이 커가듯 ‘나’라는 아집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습기에서 태어난다. ‘나’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그 오해. 시간과 공간이란 무엇인가?


21세기. 2001년. 1월. 1일. 0시. 0분. 0초. 0.1초. 0.01초, 1마이크로초, 1나노초, 1피코초, 1펨토초

...


만 년 전의 ‘여기’, 구천구백구십구년 전의 ‘여기’, 천 년 전의 ‘여기’, 백 년 전의 ‘여기’, 십 년 전의 ‘여기’, 일 년 전의 ‘여기’, 한 달 전의 ‘여기’, 하루 전의 ‘여기’, 일 분 전의 ‘여기’

...


시간은 무수히 쪼갤 수 있다. 시간에 따라 존재하는 공간은 무수히 쪼개지는 시간 속에 ‘여기’를 특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시공간에 따른 ‘나’라는 아집, ‘자아’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시공간과 사유, 자아의 관계는 무지개와 그 안에 보이는 색의 관계와 같다. 무지개의 색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로 구별되는 것 같지만 실상 그 안에는 무한히 많은 색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다.


무지개 속 어떤 색이 ‘나는 빨간색’, ‘너는 파란색’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빨간색처럼 보이는 것’일 뿐, ‘파란색처럼 보이는 것’일 뿐, ‘진짜 빨간색’과 ‘진짜 파란색’이란 없다. 무지개는 다만 그러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셀 수 없이 변화무쌍한 덩어리일 따름이다. ‘어떤 색’이라고 주장할 만한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순간의 소여에 따른 역할만 있을 뿐.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누군가를, 어느 국가를, 타민족을, 타 집단을 ‘하루빨리 박살 내버리고 평화를 찾자’는 목표는 道를 거스르는, 끝 모를 분쟁을 이어가는 오답이라는 것이다. 내가, 네가, 우리가 하는 결심과 마음가짐은 영원한 까닭이다. 끝나지 않는 엿가락 같은 시공간 덩어리 속에서 분절된 순간이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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