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밀도 노동의 시작
요즘 'AI가 내 일자리를 앗아갈까?'라는 걱정들을 많이 하죠. 이와 연관 지어서 눈여겨 볼만한 연구 결과 하나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MS 리서치팀에서 내놓은 "Working with AI: Measuring the Applicability of Generative AI to Occupations"라는 논문입니다. 연구팀은 코파일럿과의 대화 20만 건을 분석해서 AI가 실제로 어떤 직업에 어떻게 적용 가능한지를 측정했습니다.
연구팀은 AI와의 상호작용을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AI가 도와주는 사용자 목표(붉은색, User Goal) 영역, 다른 하나는 AI에게 일을 떼어주는 AI 행동(파란색, AI Action) 영역으로 나눴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체는 후자, 즉 일을 떼주는 AI 행동 영역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금융이나 미디어 쪽은 AI 행동 영역의 점수가 높아서 일부 업무가 위임될 가능성이 컸지만 대다수의 전문직이나 관리직은 AI를 도구로 써서 내 업무를 완성하는 사용자 목표 영역의 점수가 높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번역가나 작가처럼 결과물 자체가 텍스트인 직업은 AI의 타격감이 크겠지만, 복합적인 맥락을 읽어야 하는 대부분의 직업에서 AI는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같은 도구에 가깝다'라는 의미입니다. 워드프로세서가 나왔다고 비서라는 직업이 사라진 게 아니라, 타이핑이 기본 소양으로 바뀐 것처럼 AI도 그리 될 가능성이 큽니다.
'AI는 인간의 일자리를 뺏기보다, 우리가 하기 싫어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을 대신해 주고, 인간은 더 창의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일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라는 뉘앙스로 결론을 이끌어 갑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행복한 결론이죠. 저도 큰 틀에선 MS의 연구 결과에 동의합니다.
다만, 디테일에선 얘기가 다릅니다.
디테일에서 동의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긴 다름 아닌 대. 한. 민. 국. 이니까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대한민국의 조직 토양을 고려할 때, MS 리서치 팀의 연구엔 세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 1: 효율성이 업무량 감소로 이어지 않는다
MS의 연구에서는 AI가 작업을 완료하고 시간을 단축하는 데 기여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효율성이 반드시 업무량 감소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되려 AI 도입을 명분 삼아 인력을 감축하거나 신규 채용을 줄일 가능성이 큽니다.
업무가 편해지긴 커녕 되려 AI를 끼고 줄어든 동료의 몫까지 처리해야 하는 고밀도 노동이 될 수 있습니다. 효율의 과실을 여유가 아닌, 더 빡빡한 노동으로 돌려받는 셈이죠.
오류 2: 위임 같은 소리 한다 진짜
AI에게 일을 위임하면 그만큼 내 일손은 편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AI가 수행한 일을 인간이 해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니까요.
가령 AI가 '내년도 A사업부 예산을 15% 삭감해야 합니다'라는 결과를 내놓았다고 칩시다. 이걸 그대로 보고할 수 있는 용자는 없습니다. 위에서 묻거든요. "근거가 뭐야? 어떤 데이터랑 어떤 데이터를 엮어서 이런 결론이 나온 거야?"
결국 실무자는 AI가 내놓은 답을 역으로 추적해서, 그 논리적 근거를 인간의 언어와 엑셀 수식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역설계 노동을 수행해야 합니다. 현 시점에서 위임은... 그냥 아름답고 조오은 얘기입니다.
오류 3: 기술적 완성도보다 정무적 완성도
MS의 연구는 사용자의 피드백과 작업 완료율을 성공의 척도로 봤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직에서의 완료는 기능이 아닌 정무적으로 오케이 사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보고 문화에서 문서 작성은 상사의 의중을 읽고, 조직의 정치적 역학을 고려하여 톤 앤 매너를 맞추는 의전의 성격을 띱니다. AI가 작성한 초안을 팀장의 고유 어휘, 전무님이 최근에 꽂힌 단어, 사장님의 큰 그림에 맞추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AI가 쓴 티가 나는 보고서는 성의 부족으로 간주될 위험이 크거든요.
이제 까놓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누구나 전문가 수준의 글쓰기와 정보 처리를 할 수 있게 되어, 숙련도 격차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장밋빛 미래가 대.한.민.국.에서 가능한지 말이죠.
무한 튜닝 지옥
작금의 AI는 중간 수준의 결과물을 빠르고 방대하게 쏟아냅니다. 신입이 며칠 걸려 가져올 수준의 초안을 단 몇 초 만에 뱉어내죠. 하지만 결정권자의 눈높이는 그 이상에 맞춰져 있습니다. 중간 수준의 AI 결과물을 결정권자의 눈높이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AI가 쏟아낸 방대한 텍스트와 데이터를 조직의 입맛에 맞게 깎고 다듬는 편집과 튜닝 작업이 실무자에게 떨어집니다. "AI가 다 해주는데 왜 야근해?"라는 핀잔을 들으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번역투의 AI 문장을 결정권자 언어로 바꿔대는 고밀도 정신노동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여전히 두터운 부서 간 장벽
AI는 여러 분야의 지식을 통합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데 탁월합니다. 다만 그 탁월함은 어디까지나 데이터가 투명하게 공유될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기업, 특히 기업의 크기가 커질수록 부서 간 장벽은 두텁습니다. 영업 데이터는 영업본부의 성역이고, 인사 데이터는 인사팀장의 D드라이브에 있죠. AI가 똑똑해도, 접근 권한이 없는 데이터는 분석할 수 없습니다.
AI 활용이 개인기 수준에 머무르는 건 결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AI가 내놓은 반쪽짜리 결과물을 들고, 필요한 파일이 있는 부서에 메시지 넣고 전화 돌려서 PDF와 엑셀 취합하러 다녀야 하는 구조의 문제입니다.
강제된 공존과 소진되는 중간 직군
여기에 더해진 인구 절벽은 AI와의 공존을 강제합니다. 일할 사람은 줄어들지만 해야 할 일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AI 도입은 장기적으로 사라진 사람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생존 전략이 되니까요. 그리고 비용을 핑계로 신규 인력을 미루는 대신 중간 직군에게 "AI 줬으니까 1.2인분 정돈할 수 있지?"라고 더 얹어주게 됩니다. 중간 직군은 관리자급으로 가기도 전에 지쳐 소진될 가능성이 큽니다.
성장과 학습도 철저히 개인의 몫으로 분류될 겁니다. '모르는 건 AI한테 물어보고 바로 실무 수행해'라는 식의, 건조하고 성과 중심적인 분위기가 가속화되겠죠. 여러모로 달갑지 않은 광경입니다.
눈치가 밥그릇을 지켜주리라
여기까지 오면 '이제 여기서 AI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제아무리 AI가 데이터 분석과 코딩을 기깔나게 해낸다 한들, 당장 나에겐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상무님에게, 새 프로젝트를 어떻게 포장해서 보고해야 경영진 보고까지 살아서 갈까?'같은 정무적 판단이 먼저니까요.
MS의 논문엔 'AI가 스스로 작업을 완료하는 것보다 인간을 보조할 때 더 효율적이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AI가 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정치·전략적 판단과 눈치의 영역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로 남는다는 뜻입니다. 그 지긋지긋한 눈치 보기와 사내 정치가 이젠 내 밥그릇을 지켜줄지도 모르는, 씁쓸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결론을 맺자면, AI가 내 일자리를 앗아가진 못할 겁니다. 혹여 내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그건 AI 때문이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는 경직된 조직이 잃어버린 것이겠죠. 대신 더 고단해질 겁니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튜닝하느라, 그리고 AI 도입 성과를 포장하느라 바쁠 테니까요.
새로운 기술은 세상을 평평하게 만들려 하지만, 사회의 굴곡은 기술마저 굴곡지게 흐르도록 만듭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겠죠. 다만 그 굴곡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할 우리의 내일이 조금 더 뻐근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겁니다.
입맛이 텁텁하군요. 이따 시원한 맥주나 한 모금하고 자야겠습니다.
[참고자료]
Working with AI: Measuring the Applicability of Generative AI to Occup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