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Sep 29. 2015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 쟁탈전

플롱-플롱과 그 아들의 불화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가문의 대부분의 아들들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이것은 가문의 터전을 닦았던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를 기리는 의미였죠. 하지만 나폴레옹 1세의 적자였던 나폴레옹 2세(또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는 후손 없이 사망했으며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에게도 두 딸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보나파르트 가문은 나폴레옹의 동생들의 후손에 의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단 나폴레옹의 형제 중 뤼시엥은 나폴레옹에게 늘 반항하는 입장이었고 이 때문에 가문 내에서도 수장 자리에서 배제되는 분위기였습니다.(게다가 뤼시엥 쪽에도 남성직계 후손이 단절되게 됩니다.)


황제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 이후 프랑스에서는 또 한명의 나폴레옹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인 루이-나폴레옹, 바로 나폴레옹 3세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등장하던 시기.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나폴레옹 3세를 제외하고 보나파르트 가문의 후계자라고 주장할만한 인물은 뤼시엥의 아들들을 제외하면,  제롬의 둘째 아들이었던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파울 보나파르트 밖에 없었습니다. 이름만 보면 누가 누군지 모르는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인 것은 현재나 과거나 마찬가 지였던지, 이 제롬의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플롱-플롱"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있죠. 


두 아들과 함께 있는 플롱-플롱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잡았던 시기 그는 미혼이었으며 법적으로 후계자가 될만한 적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플롱-플롱은 자신이 나폴레옹 3세의 후계자가 되길 꿈꿨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1853년 외제니 황후와 결혼했으며 1856년 외동아들인 나폴레옹 유진 루이 장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태어납니다. 그는 역시나 이름만 보면 누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간단히 프린스 임페리얼로 알려져있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후계자가 되겠다는 플롱-플롱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플롱-플롱은 외제니 황후에 적대적이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행동을 했죠. 사실상 플롱-플롱과 외제니 황후는 정적이나 다름없었고 플롱-플롱은 이런 외제니 황후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많은 안 좋은 이야기들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는 프린스 임페리얼이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리까지 포함되어있었죠. 이런 그의 행동은 외제니 황후의 아들인 프린스 임페리얼도 그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느끼지 않게 만들게 됩니다.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 그리고 둘의 외아들




1870년 나폴레옹 3세는 몰락했고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는 영국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프린스 임페리얼이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이 되었죠. 하지만 그는 미혼으로 1879년 보어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게 됩니다. 프린스 임페리얼의 죽음은 플롱플롱이 오래도록 바라던 가문의 수장 자리를 얻는 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플롱플롱의 착각이었으며 오랜 부자 간의 불화의 시작점이  됩니다.


프린스 임페리얼은 유언장에서 자신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가문의 수장을 명시합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에게 오래도록 적대적이었던 플롱-플롱이 아닌 플롱-플롱의 장남이었던  열여덟 살의 나폴레옹 빅토르를 수장으로 지명한 것이었죠. 

이 상황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불화로 발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프린스 임페리얼의 유언장은 거의 무시되는듯했습니다. 나폴레옹 빅토르는 미성년이었기에 그가 수장 자리를 이어받는다는 것을 무리라고 여겨졌죠. 하지만 보나파르트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가문의 수장이었던 프린스 임페리얼의 유언을 존중했고, 지지자들 대부분은 플롱플롱이 아닌 나폴레옹 빅토르를 수장으로 인정했고 플롱플롱을 지지하는 사람은 소수가 됩니다. 이렇게 되자 플롱플롱은 아들인 나폴레옹 빅토르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나폴레옹 빅토르 역시 처음에는 아버지가 수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지지자들이 그의 아버지가 아닌 그를 가문의 수장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역시 이 상황을 받아들였죠. 


"제롬 나폴레옹", "플롱-플롱"




결국 이 문제는 1891년 플롱-플롱이 죽으면서 해결됩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으며 그는 유언장에서 조차도 아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었죠.


나는 빅토르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내 장남은 배신자이며 반역자이다. 그의 행동은 나에게 큰 고통이며 깊은 좌절이었다. 나는 그가 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으로 지지자들에게 "나폴레옹 5세"라고 불렸던 나폴레옹 빅토르는 아버지에 비해서 매우 호의적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능력은 부족하면서 야심만 많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인 것에 비해 그는 좀 더 신중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죠. 게다가 아내인 벨기에의 클레망틴 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매우 유명한데 둘은 결혼을 허락받지 못해서 클레망틴의 아버지인 벨기에의 레오폴 2세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나폴레옹 빅토르


현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이 나폴레옹 빅토르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이 수장 자리를 두고 또 다른 부자 간의 반목이 진행되고 있대나 어쩐대나....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매거진의 이전글 신교도 왕위 계승자를 찾아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