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요한과 마리아 엘리사벳 공주
요한 3세와 구닐라 비엘케의 아들이었던 요한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 겨우 3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인 구닐라 비엘케는 아들을 스웨덴의 국왕으로 만들고 싶어 했으며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요한은 1살 때 이미 "핀란드 공작"지위를 받았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뒤 형인 시기스문드가 국왕이 되었으며 요한은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보호 아래 그의 아들이자 그보다 다섯 살 어린 구스타프 아돌프와 함께 성장했죠. 칼 공작은 조카를 마치 아들처럼 대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숙부인 칼 공작이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할 때 요한은 자신의 왕위 계승권리를 포기합니다. 그는 형인 시기스문드 다음으로 계승권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 때문에 칼 공작에게는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온 숙부가 국왕이 될 수 있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죠. 그리고 그 보답으로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령등을 더 받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평생 행정관직을 수행하면서 살았는데 그는 매우 사치스러운 인물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칼 9세와 그의 가족들은 요한을 가족으로 묶어두기 위해 칼 9세의 딸인 마리아 엘리사벳 공주와 그를 결혼시키기로 결정합니다. 겨우 14살의 마리아 엘리사벳은 21살의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인 사촌 요한과 약혼했으며 2년 후에 결혼합니다.
마리아 엘리사벳 공주는 칼 9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크리스티나와의 막내딸이었습니다. 매우 지적이며 똑똑했고 너무 과할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진 그녀는 당대에는 그녀를 너무 사랑한 부모가 그녀를 망쳤다라는 평가를 들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마리아 엘리사벳은 바사가문의 많은 사람들처럼 정신적 문제에 시달렸으리라 추측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리아 엘리사벳은 궁전에서 매우 화려한 생활을 했지만, 사실상 정략결혼으로 인해서 매우 불행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리아 엘리사벳을 극단적으로 몰아가게 만들었던듯합니다.
마리아 엘리사벳은 남편이 다스리는 공작령에서 마녀사냥을 허용하도록 법안을 바꾸게 압력을 넣습니다. 결국 요한은 아내의 뜻에 따라 자신이 다스리던 지역에서 마녀사냥을 허락하죠. 그리고 그들은 외스테르예틀란드에서 수차례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일을 했습니다.
1618년 공작 요한은 사망했는데 그는 막대한 빚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22살에 과부가 된 마리아 엘리사벳 역시 남편이 죽은 그해 사망합니다. 그녀가 죽은 뒤 외스테르예틀란드의 마녀사냥은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