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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츠하임 기습공격(1793.5.17)

프랑스 혁명 전쟁 번외 편(2)

by 엘아라


3월에 라인군이 밀어닥쳤으며, 퀴스틴의 라인군은 라인을 점령하기 전에 위치인 바이센부르크로 되돌아가야 했다. 병사들은 이런 퇴각에 장군에 대한 신뢰를 잃었는데, 반란을 시도했던 한 대위는 반란이 실패하자, 퀴스틴을 "반역자"라고 비난했으며, 파리로 돌아가서 혁명재판소에 그를 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퀴스틴의 정치적 후원자인 당통이 건재했었기에,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퀴스틴 장군은 마인츠를 구원하기 위해 기습공격을 시도한다.


라인군의 우샤르 장군 휘하 36연대 adjustant major (중위보다는 높고 대위랑 비슷한 직급이긴 한데 결정적으로 대대 지휘권이 없는 참모 장교인듯해요.) 였던 베르나도트는 프랑스군이 라인에서 퇴각해서 바이센부르크로 갈 때 자신의 대대와 함께 빙엔에서 바이센부르크로 이동 행했다. 뢰스에서 머물던 베르나도트는 5월 16일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일곱 시까지 행군 준비를 끝내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아마 기습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란다우로 향할듯하다고 전한다.


123F79444DBE98A82AC8A9 1792년 베르나도트



베르나도트의 편지는 주로 자신이 지휘권을 갖는 장교로 승진하고 싶다는 내용이긴 했지만, 첫 머리에 언급한 기습작전이 바로 다음날인 5월 17일 퀴스틴장군이 라인전선에서 시도한 마지막 마인츠 구원작전이었다.


5월 17일 퀴스틴 장군은 룰츠하임에서 오스트리아 군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성급하게 세워진 이 기습공격은 제대로 된 계획도 아니었으며, 프랑스군에 유리하게 진행되지도 않았다.

이 기습공격 동안 몇몇 훈련을 덜 받은 의용 군들은 오스트리아군을 추격 중이었던 프랑스군의 선두를 향해 발포를 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을 쫓던 선두부대들은 혼란에 빠졌다. 뒤쪽에서 공격을 당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선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기마보병들이 대열을 하나둘씩 이탈하기 시작할 때쯤 포병대의 포공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전선의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투열을 마구 뒤섞였고, 병사들은 통제 불능이 되었다.

한참 후에야 병사들이 다시 재 집결했으며, 포병이 다시 포를 쏠 수 있게 되자 오스트리아군은 추격을 멈췄다. 간신히 대패를 면한 프랑스군은 다행히 바이센부르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베르나도트는 혼란한 군대를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5월 26일 형에게 보내는 베르나도트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전장에서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하는 동안, 저는 이 굴욕적 광경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군율을 바로잡으려는 어떤 장교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저는 이 무질서한 대대 한복판으로 갔습니다. 저는 소리치고, 화를 내고, 애원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소란스러움과 혼란이 너무나 컸기에 병사들은 제 말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머스킷 총성을 들었고, 전 이중 일부라도 방향을 바꾸게 하려고 제 칼끝으로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저는 이제 최전선이 되어버린 대대 뒤편으로 달려갔습니다. 제 말은 지쳐버렸지만, 전 제 위치를 유지했고, 병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군들, 여기가 재 집결지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이곳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더 이상 후퇴는 없다. 나는 여러분이 자기 위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여러분들의 방패는 어려 분의 총검과 용기이다. 다른 이들에게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치면서 자유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하자. 하지만 우리는, 가능하다면, 우리 위치에서 총을 쏘며 죽음을 택하자! "공화국만세(Vive la Republique), 프랑스 만세(vive la Nation)" 다시 모이자, 전우여, 그 용병 노예들(hired slaves) 에 대항해서 앞으로 나가자. 정복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가 나아간다면, 우리를 패배시키기는 힘들것이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제 소리를 들은 병사 몇몇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adjustant-major를 따라 적을 향해 돌진하자" 전 그들에게 전투명령을 내렸고, 혼란을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뒤로 있던 다른 여섯 개의 대대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저는 포병을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오게 했고, 포를 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적들은 감히 추격할 엄두를 못 냈고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실패가 예상된 반격이었지만, 저희는 전장에서 버텼습니다. 적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저희도 그랬습니다. 18개의 그룹이 분할 없이 바이센부르크로 회군했습니다. 모든 장교들이 제 용기와 성공에 축하해줬습니다. 병사들은 저에게 열성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여기서 끝입니다. 왜냐면 누구도 총사령관에게 제 행동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급장교의 행동은 종종 알려지지 않는 반면, 지휘관들의 실수는 큰 공으로 무마됩니다. 하지만, 이 설명에서 처럼, 전 공화국에 대해서 여전히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공화국은 제가 헌신하는 곳이니까요. 안녕히 계십시오. 어머니께 포옹해주십시오.
J. Bernadotte
Wissenbourg 26th May 1793



이날의 전투는 퀴스틴장군과 베르나도트에게는 서로 다르게 작용했다.

퀴스틴장군은 당피에르가 죽은 북부군 사령관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발랑시엔이 함락당하자, 혁명재판소에 반역자로 회부되었고, 마인츠와 발랑시엔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푸키에 탱빌과 친분이 있었던 클레베르는 친구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퀴스틴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 하지만 퀴스틴은 8월 길로틴형으로 처형당했다.

이렇게 퀴스틴에게는 불행한 전투였지만, 베르나도트에게는 행운의 시작이었다. 편지의 내용처럼 퀴스틴장군의 보고서에는 베르나도트의 활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의 부대는 그의 행동에 대해 보상해줬다. 7월 18일 베르나도트의 연대는 베르나도트를 대위로 선출했고, 그는 원하던 지휘권을 갖는 지휘관이 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지 않은 8월 8일에는 중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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