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 여섯 번째
1839년 당시 21살의 러시아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표면상의 목적은 "견문을 넓힌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신붓감을 구하는 것이었죠. 황제인 니콜라이 1세는 아들을 위해 여러 왕가의 여성들을 선보도록 주선해놨었습니다. 러시아 황태자는 당대 최고의 신랑감이었고 권력과 외교적 동맹, 명예와 부를 노리는 많은 가문에서 서로 딸들을 시집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죠.
황태자는 그다지 맘에 드는 여성이 없었는지 독일 전역을 거쳐 이탈리아와 심지어는 영국에 까지 가게 되죠. 그리고 황태자가 마음에 들어한 여성은 모두의 예상을 깬 여성이었습니다.
황태자는 다름슈타트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다름슈타트는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작은 도시로 "헤센 대공령"의 수도였습니다. 러시아 황실에서는 헤센 대공가에서는 신붓감을 구하려 하지 않았기에 황태자는 자신을 영접한 헤센 대공의 초대를 의례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황태자는 운명의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대공의 열네 살 난 딸인 마리 빌헬미네였죠. 그녀는 결혼하기에 너무 어렸으며 결정적으로 헤센 대공이 마리 빌헬미네를 딸로 인정하긴 했지만, 빌헬미네의 친아버지는 대공비의 시종무관이라는 소문이 전 유럽 왕가에 퍼져있었던 상황이었죠.
이런 악조건에도 황태자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처음에는 못마땅해했지만 결국 결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마리 빌헬미네는 황태자와 결혼하면서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정교회식 이름을 얻게 됩니다. 니콜라이 1세는 곧 며느리가 자신이 원하던 이상적인 며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우 교육을 잘 받았으며, 남편과 시부모에게 순종적이며 황실에 후계자 걱정 없이 아들들을 왕창 낳아주었으며 정치에는 관심 없이 오직 아이들의 교육에만 힘쓰는 모습이 딱 니콜라이 1세가 원하던 며느리감이었죠.
그리고 후에 황태자 부부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가 됩니다.
이게 끝이냐고요? 아니요 이제 이야기가 시작이랍니다.
동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왕자님과 공주님은 그렇게 행복하게 살지는 못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을 계속 낳은 황후는 연약한 왕녀들이 견디기 어려운 러시아 날씨를 견디지 못했고 자주 요양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가 없는 동안 황제는 다른 여성들과 연애질을 일삼으면서 살았었죠. 사실 유럽 왕족들 이야기에서 이 정도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알렉산드르 2세의 이야기는 좀 더 잔혹한 이야기로 나가게 됩니다.
1864년 46살의 황제는 우연히 죽은 친구의 딸을 만나게 됩니다.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 돌고루코바는 이때 겨우 열일곱 살이었죠. 예카테리나의 아버지는 예카테리나가 어린 시절 죽었으며 황제는 후견인으로 친구의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곧 예카테리나에게 반해버렸고 이 사실을 안 예카테리나의 가족들은 그녀를 황제의 정부로 만들려 하죠. 하지만 차라리 황제의 아들과 더 어울릴 나이였던 예카테리나는 황제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황제는 예카테리나와 계속 만나긴 했지만 정부가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865년 상황은 변하게 됩니다. 황제가 가장 아낀 장남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을 잃은 황제 부부는 매우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황후는 아들의 죽음에 힘들어했고 종교에 귀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황제는 에카테리나에게 위로를 받게 되죠. 10대 후반의 감수성 예민하던 예카테리나는 황제의 좌절감에 깊은 애도를 느끼게 되었고 곧 황제에 대한 애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1866년 황제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일어나면서 예카테리나는 황제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예카테리나와 깊은 사이가 되면서 그녀에게 "언젠가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너와 결혼하겠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제와 예카테리나는 서로를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시집와서 황제에게 아들들을 왕창 낳아준 연약한 황후는 이미 황제의 안중에도 없었죠.
1870년대 황후는 매우 위중하게 됩니다. 거의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죠. 이때 러시아의 정치 상황은 더욱더 혼란스러웠으며 황제와 황제 가족에 대한 테러 역시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르 2세는 예카테리나와 아이들의 안위를 걱정했고 결국 자신이 살고 있던 겨울 궁정으로 예카테리나와 아이들을 불러들입니다. 황제는 잔인하게도 황후가 누워있는 침실 윗방을 예카테리나와 아이들이 쓰게 했으며 비록 거의 의식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황후는 예카테리나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에서 황제의 말과 행동은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가족 누구도 황제에게 항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황제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처사가 못마땅해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죠. 한 번은 겨울 궁전에 테러가 있어서 식당이 폭파되었는데 그때 러시아에 있었던 황후의 오빠는 황제가 자신의 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먼저 예카테리나를 찾으면서 걱정하는 모습에 매우 씁쓸해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러 온 황제의 고명딸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며느리였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이 오면서 끝나게 됩니다. 여대공은 아버지에게 매우 화를 냈으며 부녀는 다툼을 했지만 결국 예카테리나와 아이들은 떠나야 했습니다.
1880년 6월 황후가 죽었고 황제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황후가 죽은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황제는 예카테리나와 비밀 결혼을 합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경악스러운 일이었는데 황제가 황후의 죽음에 대한 애도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정부와 결혼해버렸기 때문이었죠. 황제는 지속적으로 암살 시도에 시달렸기에 그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고 생각했었고 이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싶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아버지로써 군주로써 모두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행동이었죠. 특히 황태자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아버지의 행동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러시아에서 황태후는 황제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예카테리나를 "황후"로 만들려 하는 것은 황태자에게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었죠. 물론 어머니의 죽음을 그렇게나 잊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황제는 예카테리나와의 결혼은 "귀천상혼"이라고 명시했고 예카테리나에게 "유리예프스카야 공비"라는 지위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상 황후나 다름없었으며 황제의 정식아내로 전 황후에게서 황후라는 지위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되죠. 이런 상황은 황실 가족들이 유리예프스카야 공비에게 반감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특히 여성들이 극심한 반감을 가졌는데 "야심 많은 어린 여자가 황제를 유혹해서 황후를 버림받게 하고 황제와 결혼해서 황후가 되려 한다"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죠.
황제와 유리예프스카야 공비는 이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즐기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둘 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고 결국 이것은 다시 주변 인물들의 반감으로 이어지게 되죠. 한 번은 유리예프스카야 공비가 공식석상에서 황제를 애칭으로만 불러서 모두를 경악시켰으며 결국 이것은 유리예프스카야 공비의 평판을 더 떨어뜨리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알렉산드르 2세는 겨우 한 달 정도 홀아비로 지냈었습니다.
그리고 재혼한지 8개월쯤 후인 1881년 3월 13일 암살당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