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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01. 2015

마누라 제발 죽어줘!

가벼운 역사  이야기... 일곱 번째

러시아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이 니콜라이 대공은 아버지 니콜라이 1세와 다른 많은 로마노프 가문 출신의 대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군대가 삶의 전부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군대에 열광한 다른 로마노프 대공들처럼 키 크고 강인하게 생겼으며 지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대공들은 그래도 "잘생긴"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데 이 니콜라이 대공은 그런 수식어가 붙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수식어인 "바람둥이"라는 수식어는 붙어있었죠.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대공비는 올덴부르크 공작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녀의 할머니는 파벨 1세의 딸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으로 예카테리나 여대공이 재혼한 뒤 그녀의 아버지는 러시아 궁정에 남아서 자랐었죠. 이런 상황은  알렉산드라 페드로브나 대공비가 니콜라이 대공과 결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알렉산드라 대공비 역시 "예쁘다"라는 평가를 받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달리 매우 지적이었으며 약학 등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선사업 등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죠.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대공비


대공 부부는 결혼 직후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게 됩니다. 둘은 서로 취향이 맞지 않았었기 때문이었죠. 니콜라이 대공은 아름답거나 세련된 여성을 좋아했으며 연애질이 다반사였죠. 한편 알렉산드라 대공비는 자신의 옷차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종교생활에 열심이거나 불우한 이들을 돕는데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않았고 서로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대공은 더 다른 여성들을 만나고 다녔으며 대공비는 더 가난한 이들에게만 관심을 보였고 이런 상황은 부부 사이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이 당시 유럽 왕족들은 함부로 헤어질 수 없었고 둘은 체면과 위신 때문에 마지 못해서 부부로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니콜라이 대공 부부


니콜라이 대공은 1860년대 후반 무용수였던 예카테리나 치슬로바와 연애관계가 되었고 치슬로바를 정부로 두게 됩니다. 대공은 이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으며 딸이 태어난 뒤로는 아예 대놓고 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대공은 집에서 애인에게 가기 편하게 집 바로 앞에 애인의 집을 마련해주고 두 집 살림을 했죠. 대공비는 이 상황에 열 받아서 키예프로 가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대공비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대공비도 참을 수 없게 됩니다. 대공은 애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작위를 내려달라고 황제에게 청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정식 자녀로 인정해달라는 것이었죠. 아내가 살아있는데도 이러는 것이야 말로 아내를 무시하는 처사였기에 대공비는 황제에게 이런 처사는 못 참겠다고 하소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비록 황제는 대공비에게 "대공은 자신의 삶에서 정점을 즐기고 있고 그가 사랑할만한 여인과 함께 있소. 하지만 당신 꼴을 보시오 옷조차도 제대로 입고 읺지 않소"라고 불친절하게 말하긴 했지만, 동생의 행동이 너무 과하다고 여겼었죠. 황제는 대공에게 경 고한 뒤 대공과 그의 애인을 멀리 리가로 한동안 여행을 보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유배 보낸 것이었죠.


예카테리나 치슬로바


1881년 알렉산드라 대공비는 키예프의 황실 궁전에서 거주했으며 지긋지긋한 남편을 완전히 떠나기 위해 대공비로써의 의무에서 은퇴한 뒤 수녀원에 들어가버립니다. 하지만 대공비는 남편과의 이혼은 거부했는데 아마도 자신이 이혼한다면, 남편이 남편의 형처럼 정부와 재혼해버릴 것이라 여겼고 남편이 바라던 일을 절대 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듯합니다. 대공 부부의 두 아들들은 모두 어머니 편이었다고 합니다. 


니콜라이 대공은 아내가 이혼을 거부하자, 결국 대공도 형처럼 아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실 알렉산드라 대공비는 황후처럼 연약했고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매우 심했기에 결국 대공도 아내가 먼저 죽을 거라고 예상했었을듯합니다.


하지만 1889년 대공의 정부였던 예카테리나 치슬로바가 사망했으며, 1891년에는 대공이 사망합니다. 반면 대공비는 남편보다 9년을 더 산 뒤인 1900년에 사망하죠.


에필로그

남편보다 더 오래 산 대공비는 살아있는 동안 절대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공비는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거절했으며 심지어는 남편의 묘에 방문하는 것이 싫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가지 않았을 정도라고 하네요.


수녀 복장의 알락센드라 대공비, 아나스타샤 수녀


사진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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