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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전쟁(15)

1793년 9월-10월 :옹드스코트 전투 결과

by 엘아라

1973년 9월의 며칠간의 전투동안 발모덴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000명이상의 장교와 9000명가량의 병사를 잃었다. 그중에는 헤센장군이었던 요한 프리드리히 폰 코헨하우젠도 포함되었다. 반면 프랑스측 사상자 기록은 학자마다 차이가 있는데 당시 전투에 참여했었던 한 사람은 사상자가 1800명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약간 후대의 전술사가였던 조미니는 아마도 프랑스군 사상자는 동맹군의 사상자와 비슷하리라 추정했다.옹드스코트 전투는 동맹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3만명의 프랑스군이 14500명의 동맹군을 물러나게 했으며 여섯개의 군기를 빼앗기도 했다.

요크 공작은 전투가 패배한후 영국으로 보내는 보고서에서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은 내각을 비난했다. 동맹군에 있었던 한 장교는 해군만 제때 도착했어도 됭케르크는 벌써 점령했으리라고 주장하면서 제때 지원해주지 않은 영국 정부를 비난했다. 옹드스코트 전투에 대해서 요크 공작은 지휘관이었던 프라이타그 장군에 대해서 비난했다. 프라이타그는 요크 공작의 군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음에도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학자는 프라이타그의 행동에 대해서 "그는 완벽한 장소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단지 자신의 임무-요크공작을 엄호하는것-을 잊었을 뿐이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143705404F41A9D117C4DA 요크와 알바니 공작 프레드릭


Frunes에서 요크 공작은 부대를 다시 재정렬할수 있었다. 사실 우샤르는 요크 공작이 코부르크 공이 있는 케누아쪽으로 후퇴하길 바랬었고 요크 공작의 부대와 결전을 벌리는 것은 목적이 아니었다.

우샤르는 코부르크공과 요크 공작 사이에 있던 오라녜공은 9월 12일 공격에서 무찔렀다. 오라녜공의 부대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치기 급급했고 3일후에나 겨우 재정렬할 수 있었다. 하지만 9월 11일 케누아를 점령한 코부르크공이 요크공작을 돕기 위해 오면서 상황은 다시 바뀐다. 9월 12일 코부르크 공의 휘하에 있던 리히텐슈타인 공 요한 1세 요제프는 약 2000명이 기병을 데리고 약 7000명의 프랑스 보병을 무찔렀다. 이때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2000여명이었으며 2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1807153F4F41A9ED2175E1 리히텐슈타인의 요한1세 요제프


이 패배는 파리에 큰 충격을 주었고 우샤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12일의 전투를 알지 못한 카르노는 9월 13일 우샤르에게 엄청난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곧 전투 소식이 알려지게 되면서 파리는 공포에 떨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국민의 대표자에게 미운털이 박혔던 우샤르는 9월 23일 체로되어 파리로 압송된다. 우샤르는 공포정치기에 처형된 많은 사람들처럼 파리의 콩시에쥐리 감옥으로 갔다. (이곳에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있었다.) 우샤르는 전임자였던 퀴스틴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고 길로틴형을 받게 된다. 혁명재판소의 재판장중 한사람은 재판중 우샤르를 "겁쟁이"이라고 비난했다. 이 말에 우샤르는 "이것이 나의 대답이오"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셔츠를 열고 가슴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칼에 베인 세개의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공포정치기에 많은 장군들이 처형당했지만 우샤르보다 더 어이없는 경우는 없었다. 그는 귀족도 아니었고 밑바닥에서부터 장군이 된 인물로 사람들에게 인기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옹드스코트에서 대승을 거뒀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댓가는 "길로틴형"이었다.


1209173F4F41A9F91F1D1C 우샤르,그의 얼굴이 비대칭인것은 코르시카에서 전투중 얼굴에 총을 맞아서 였다고 합니다.


이제 북부군의 사령관이자 플랑드르전선을 관할하는 인물은 우샤르처럼 총사령관으로 경험이 부족했던 주르당이었다. 다행히도 주르당의 운명은 자신의 선임자들을 따르는것은 아니었다.


19478B444F41AA072EE428 주르당,그는 스스로 자신이 총사령관감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거부하면 반역자로 몰릴것이라 어쩔수없이 수락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앞쪽과 동일

그림출처

앞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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