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아버지가 암살당한뒤 어린 나이로 국왕이 되었습니다. 숙부였던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섭정이 되었었죠.
어려서 즉위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어른 국왕으로 변신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고 구스타프 4세 아돌프 역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왕으로써의 가장 큰 의무를 수행해야했었죠. 바로 결혼해서 후계자를 얻는 일이었습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신부감으로 선택 된 사람은 바로 러시아의 여대공이었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카테리나 2세의 손녀로 아버지는 후에 파벨 1세가 되는 파벨 표트로비치 대공이었죠.
이 결혼은 스웨덴과 러시아 양측에 나름 괜찮은 혼담이었습니다. 스웨덴은 늘 기회만 있으면 러시아와 전쟁을 했었죠. 이것은 북해연안을 둘러싼 러시아와 스웨덴간의 알력이 근본적 문제이긴했지만 스웨덴 내부 사정에 의해서 귀족권력을 억누르기 위해 전쟁을 감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에게도 골치아픈 상황이었으며, 스웨덴 역시 점차 강성해지던 러시아와 사이가 나쁜것이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었죠.
이런때 러시아의 여대공이 스웨덴으로 시집간다면 두 나라는 뭐 일단 어느정도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할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 혼담은 스웨덴쪽에 좀더 이익일수 있는 혼담이었죠.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알렉산드라 여대공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여대공을 처음 만났었죠. 여대공의 할머니인 여제는 이 젊은 스웨덴의 국왕이 마음에 들었던듯합니다. 그녀는 스웨덴 국왕과 손녀가 매우 잘 어울리는 사이이며 서로에게 보고 호감을 느꼈다고 여겼었습니다.
사실 국왕이 청혼하러 가는 것은 대부분 그쪽 나라와 조율이 대충 끝난 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하기로 대충 합의본 상황인것이죠. 그리고 신랑 후보와 신부 후보가 서로 만나서 괜찮으면 결혼하는데 보통은 그냥 결혼합니다. 이게 국익이 걸린 문제니까요.
여제가 서로 호감을 느꼈다고 생각했었고 이제 스웨덴 국왕이 손녀에게 청혼만 하면 된다고 여겼던 여제는 젊은 스웨덴 국왕에게 뒤통수를 맞습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여대공이 개신교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텼으며, 결국 여대공에게 청혼하지 않고 짐싸서 집에 가버립니다.
"대제"라는 칭호를 듣는 예카테리나 2세는 젊은 애송이 스웨덴 국왕에게 뒤통수 맞은것에 충격이 심했던듯합니다. 왜냐면 이 사건이 일어난지 3달도 되지 않아서 여제가 사망하기 때문이죠. 물론 여제가 나이가 있었긴 하지만 이 사건은 여제에게 충격이었던듯합니다.
뒷이야기1
이 사건은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를 다시 한번 악화시키는 것이었으며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스웨덴 쪽이 골치아프게 됐습니다. 스웨덴에서는 국왕의 다음 신부후보로 바덴의 프레데리케를 찾았는데 그녀의 언니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였기 때문에 이 결혼을 추진했었습니다. 그리고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바덴의 프레데리케와 결혼했습니다.
뒷이야기2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짐싸서 집으로 도망간 이유에 대해서 뒷담화들이 많았는데 뒷담화중 가장 큰 이야기는 여대공이 못생겨서였다...입니다. 사실 개종은 핑계일뿐일 가능성이 컸거든요. 물론 구스타프 4세 아돌프 상태로 봐서 개종 안하는 것이 진짜 이유였을수도 있습니다.
뒷이야기3
버림받은 신부 분위기가 된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은 우호를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아들과 결혼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소외당했는데 가톨릭이었던 합스부르크가문의 궁정에서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정교회를 믿었기에 일단 종교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시아버지의 첫번째 부인을 너무나 많이 닮았었는데(첫번째 황후가 알렉산드라 여대공의 이모) 이때문에 시아버지가 그녀에게 잘 해주는것에 대해서 시어머니가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첫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죠. 그녀의 남편은 오래 홀로 지내다 재혼하는데 그걸로 봐서는 여대공이 그리 못생긴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