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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r 02. 2016

가면무도회

구스타프 3세의 암살

베르디의 오페라중 "가면무도회"라는 오페라가 있습니다. 이 오페라는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에서 총독이 친구의 아내와 불륜관계에 있다가 결국 가면 무도회에서 친구에게 목숨을 잃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실 베르디가 처음 이 오페라에 대해 작곡할때는 이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염두에 둔것은 바로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3세의 암살이었죠. 하지만 당시 정국은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이 있었기에 정치적 목적으로 국왕이 암살당하는 내용을 오페라로 만들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몇번의 수정작업을 거쳐서 결국 오페라 가면무도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죠


https://youtu.be/KuSWLb-lxmk

Ma se m'è forza perderti, 오페라 가면 무도회중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는 평생을 걸쳐서 스웨덴에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쿠데타를 통해서 의회가 가지고 있던 권력을 국왕이 가질수 있도록 되찾았지만 스웨덴의 귀족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구스타프 3세


결국 이런 상황에서 구스타프 3세가 할수 있었던 일은 전통적 방법이었습니다. 바로 외국과의 전쟁이었죠. 구스타프 3세는 노르웨이를 가진 덴마크를 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길 바랬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절하죠. 게다가 핀란드 지방에서 구스타프 3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독립을 꾀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핀란드의 지도자들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했었죠.


결국 이런 상황은 구스타프 3세가 러시아와 전쟁을 선포하는 계기가 됩니다. 전쟁은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데 일단 해군력에서는 스웨덴이 우세했었습니다. (영국의 시드니 스미스 경이 스웨덴 측에 전쟁에 참전해서 공을 세웠던 때가 이때쯤이었던듯합니다.이때 영국 해군중 상당수가 러시아 군으로 참전했다가 많이 죽었다고)

게다가 러시아의 경우 터키와 상대하고 있었으며 폴란드 문제나 프랑스 대혁명 같은 문제도 무시할수 없었기에 평화조약을 맺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스웨덴 역시 피해가 있었고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귀족들이 많았었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평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스웨덴에 유리한 쪽으로 조약을 맺었었죠.


스벤스크순드 전투, 1790년 스웨덴과 러시아의 해전


러시아와의 상황이 정리되면서 구스타프 3세는 이제 프랑스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의 국왕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었으며 이를 진압하는 것을 모두들 바라고 있었죠. 다른 나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전쟁을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었죠. 결국 구스타프 3세의 프랑스 공격 계획은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한채 끝나버립니다.


이런 상황은 스웨덴 귀족들의 국왕에 대한 반발을 가져오게 됩니다. 러시아와의 전쟁도 모자라서 다시프랑스와 전쟁을 하려하는 국왕의 전횡을 두고만 볼수 없다고 여겼었죠. 그리고 몇몇 귀족들은 국왕을 죽이고 다른 국왕을 옹립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1792년 3월 16일 밤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가면무도회가 열리게 됩니다. 음모자들은 여기서 국왕을 암살하기로 합니다. 가면무도회였지만 국왕은 세라핌훈장의 그랜드 마스터만 달수 있는 별을 달고 나왔으며 이걸 본 사람들은 누가 국왕인지 한눈에 알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모자중 한명이었던 잉카르스트룀에 국왕을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야곱 요한 잉카스트룀


구스타프 3세는 바로 죽지 않았으며 음모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국왕이 살아있었기에 귀족들의 쿠데타는 실패하게 되었죠. 하지만 구스타프 3세는 총에 맞은 상처의 감염때문에 총에 맞은지 13일후에 사망하게 됩니다.


구스타프 3세


그의 죽음으로 어린 아들인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즉위했으며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섭정이 되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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