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프레드릭은 어떻게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나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과 그녀의 남편이었던 프레드릭 국왕 사이에서는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또 스웨덴 왕위계승문제가 일어나게 되죠.
하지만 이전의 상황보다 스웨덴의 상황은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스웨덴의 국력이 많이 약화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칼 12세의 원정 실패이후 스웨덴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는 모양새가 됩니다. 그리고 스웨덴의 경쟁자였던 러시아가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또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 이후 스웨덴은 "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귀족권력이 왕권보다 훨씬더 강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실권을 진 쪽이 국왕이 아니라 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가 되었던 것이죠.
이런 두가지 상황은 스웨덴 왕위계승문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프레드릭이 국왕으로 있던 시절, 스웨덴 왕가와 가장 혈연적으로 가까운 인물은 바로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페타르였습니다. 그의 할머니가 바로 칼 11세의 딸이자 칼 12세의 누나였던 스웨덴의 헤드빅 소피아 공주였습니다. 페타르의 아버지였던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모였던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스웨덴 왕위를 놓고 경쟁을 했지만 결국 의회가 울리카 엘레오노라를 지지하면서 스웨덴 왕위를 얻지 못했었습니다. 이후 그는 러시아와의 유대관계를 맺게 되는데 표트르 대제의 딸이었던 안나 페트로브나와 결혼했으며 그 외아들이 바로 페타르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스웨덴 왕위계승에 문제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왜냐면 페타르는 이모였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의 의해서 "러시아 황위계승자"로 지목되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스웨덴은 옐리자베타 여제의 러시아에 다시한번 패배하므로써 러시아의 강한 간섭을 받을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조카의 오촌이었던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추천합니다. 그는 복합적으로 옐리자베타 여제와 연결이 되는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아돌프 프리드리히의 형이었던 카를 아우구스투스는 옐리자베타 여제와 한때 약혼했었지만, 약혼 직후 그가 사망하면서 옐리자베타 여제는 그와 결혼할수 없었습니다. 또 아돌프 프리드리히의 여동생의 딸은 옐리자베타 여제의 후계자인 표트르와 결혼해서 후에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되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여제는 이런 가족관계와 여러가지 정치적 문제 때문에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왕위계승자로 지목했었던 것입니다. 여제는 그를 국왕으로 받아들인다면 러시아가 차지했던 영토의 일부를 반환해주겠다는 의사를 비췄었죠.
당시 스웨덴 의회를 장악했던 귀족들은 이 안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합니다. 그러나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왕위계승자로 지목되는 것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덴마크의 왕위계승자가 스웨덴의 왕위도 가지길 바랬습니다. 칼마르 동맹 시기처럼 노르웨이와 덴마크와 스웨덴이 한명의 국왕의 통치하에 있게 되길 바란것이었죠. 덴마크의 왕위계승자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가 된다면 러시아와의 투쟁에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스웨덴에 힘을 실어줄수 있을 것이기에 이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농민들이 이 생각을 지지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정을 장악한 귀족들은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왕위계승자로 내세우려했기에 이에 농민들이 반발하고 세력을 규합합니다. 그러나 귀족들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인 아돌프 프레드릭으로 스웨덴으로 오게 되죠.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자료출처
앞쪽과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