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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y 18. 2016

아직은 벼락부자에서 못 벗어난...

칼 15세와 오스카르 2세의 결혼 문제

오스카르 1세와 요세피나 왕비 사이에서는 모두 다섯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들 넷에 딸한명으로 왕위계승자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칼 14세 요한과 그의 가족들, 아이들은 모두 오스카르 1세의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오스카르 1세의 자녀들이 자라면서 결혼할 나이가 되면서 문제가 좀 복잡해지게 됩니다. 그때까지도 유럽의 다른 왕가들은 스웨덴 왕가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스카르 1세와 요세피나 왕비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며 이때문에 자녀들의 결혼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왕위계승자였던 장남 칼의 결혼에 대해서 매우 신경쓴 오스카르 1세와 요세피나 왕비는 프로이센과의 통혼을 추진합니다. 혼담의 대상이 된 여성은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조카였습니다. 비록 당시 프로이센 국왕의 조카이긴했지만 루이제의 백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후손이 없었고, 결국 루이제의 아버지인 빌헬름이 왕위를 이을 예정이었기에 루이제와의 혼담은 프로이센 국왕의 딸과의 혼담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스웨덴의 칼 15세


사실 이 혼담이 성사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세피나 왕비의 이모였던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녀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왕비였는데 매우 다정한 성품으로 프로이센 왕가 사람들이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세피나 왕비는 이 이모와 매우 친한 사이였으며, 이에 엘리자베트 왕비는 조카의 아들을 위해서 프로이센 공주를 선보여준것이었습니다.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프로이센의 왕비,요세피나 왕비의 이모


왕가의 결혼은 약혼 직전에 대부분 조율이 끝난 상황으로 결혼할 사람들이 만나서 청혼하고 약혼을 발표하므로써 공식화했습니다. 그리고 칼은 루이제에게 청혼하러 베를린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칼은 이 결혼을 거부합니다. 결혼을 파토 내버린 상황에 대해서 모두가 당황했는데 일단 수습하기 위해서 서둘러 루이제가 병약해서 후계자를 얻을수 없을것 같다는 이유를 둘러댔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모두에게 곤혹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혼담을 추진했던 엘리자베트 왕비는 조카손자에게 매우 화를 냈으며, 칼의 부모인 스웨덴 국왕 부부도 화를 냅니다. 칼의 동생이었던 구스타프는 루이제가 건강해진다면 자신이 그녀에게 청혼하겠다고까지 했었습니다. 어쨌든 스웨덴과 프로이센간의 혼담은 없었던 것이 됩니다.

뭐 훗날 루이제는 바덴 대공과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았는데 루이제의 딸인 바덴의 빅토리아는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루이제, 빈터할터 그림


스웨덴 왕가에서는 다시 칼의 신부감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찾은 여성은 네덜란드 국왕의 손녀인 네덜란드의 루이제였습니다. 그녀는 칼이 거부했던 프로이센의 루이제와는 사촌관계였는데, 네덜란드의 루이제의 어머니가 프로이센 공주로 프로이센의 루이제의 고모였습니다. 네덜란드의 루이제는 여러 조건이 맞는 여성이었는데 일단 오래된 왕가 출신에 신교도였습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오래전부터 부유한 곳이라고 알려져있던 곳으로 부유한 네덜란드 왕가 출신의 루이제가 지참금도 많을 것이라 여겼었죠.


하지만 막상 결혼 협상을 하면서 지참금도 얼마 되지 않고, 미모 역시 프로이센의 루이제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미 프로이센 공주와의 결혼을 깼었기에 이번에도 혼담을 파기한다면 더이상 신부감을 구할수 없을 거라는 걱정을 했던 스웨덴 왕가는 결국 결혼을 강행하게 됩니다.

칼은 루이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어쩔수 없이 결혼했고 결국 둘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칼은 수많은 정부들이 있었고,스웨덴에서 "로비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루이제는 이런 남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온갖노력을 다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루이제, 스웨덴의 로비사 왕비


칼의 결혼 문제가 엄청나게 복잡하게 흐르면서, 오스카르 1세와 요세피나 왕비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다른 자녀들의 결혼은 미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혼담이 있는 당사자들이 만나보고 괜찮다고 생각하면 결혼시키기로 말입니다.


1850년대 오스카르 1세의 장남인 칼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지만 일찍 사망했고 그 결과 딸만 한명 남았으며 아내와의 사이에서 남성 후계자를 기대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스카르 1세의 둘째아들인 구스타프는 결혼전 사망했고 결국 셋째아들인 오스카르가 유력하 왕위계승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스웨덴 왕가는 오스카르의 결혼은 신중하게 결정하기로 했는데, 오스카르는 전 유럽을 다니면서 신부감을 구하러 다니게 됩니다. 여러 신부후보들을 만나보고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으러 다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찾은 여성이 나사우 공작의 딸이었던 소피아였습니다. 둘은 서로 혼담을 위해 만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 이후 오스카르는 스웨덴으로 가서 소피아와 결혼하겠다고 결정하게 되죠.


오스카르와 소피아


대부분 정략결혼으로 국익이 된다면 그냥 결혼했었던 많은 왕족들과 달리 오스카르가 이런 결정권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형인 칼이 이미 한번 선례를 남겼기에 만약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유럽의 다른 왕가들에서 딸을 주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듯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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