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르 1세의 결혼이야기
프랑스의 베르나도트 장군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인 "칼 요한"이 되었으며 이후 스웨덴의 국익에 따라 모국인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해서 승전국가로써 지위를 확고하게 얻게 됩니다. 이후 그는 노르웨이를 합병하므로써 스웨덴의 영토를 더 넓혔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재정문제에도 어느정도 도움을 주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칼 14세 요한은 혈통으로 견고하게 다져진 유럽 왕가의 네트워크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바로 빈회의를 통해서 이 견고함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빈회의는 나폴레옹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려하는 회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칼 14세 요한은 나폴레옹 전쟁때문에 스웨덴의 국왕이 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나라들과 함께 승전국의 국왕이었으며, 군대를 이끌고 모국인 프랑스와 전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작게는 과들루프를 뺏긴것부터 크게는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아들인 바사공 구스타프에 대한 유럽 왕가의 호의적 반응까지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후손들 역시 여기에 껴야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과들루프는 원래 프랑스령이었으며 일부에는 스웨덴의 통치 지역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중 영국이 이 과들루프를 장악했으며 영국은 프랑스가 아닌 연합군에 들어간 칼 14세 요한을 위해 이 과들루프 섬의 지배권을 국왕과 그 후계자 개인에게 주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칼 14세 요한이 연합군에 들어가면서 잃은 프랑스내 재산에 대한 배상적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빈회의에서 이 과들루프를 다시 프랑스로 넘기기로 결정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지게 됩니다. 결국 칼 14세 요한은 과들루프를 뺏겼죠. 대신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았는데 이 돈을 당시 파탄 상태였던 스웨덴의 재정으로 썼습니다. 이후 스웨덴 의회는 이 돈에 상응하는 "국왕에 대한 연금"을 부여했습니다. 이것이 "과들루프펀드Guadeloupefonden"라고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연금은 종료시점이 정해져있지 않았기에 오래도록 지속되었는데 현 스웨덴 국왕이 즉위 한뒤 스웨덴 왕가에 대한 여러가지 개혁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 과들루프펀드 역시 정리되어서 더이상 스웨덴 왕가는 이 과들루프펀드에 대한 연금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칼 14세 요한은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스카르를 유럽의 유서 깊은 왕가 출신의 여성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비록 칼 14세 요한과 오스카르는 "벼락부자"라고 비웃음 당했을지 모르지만, 오스카르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였으며 그의 아내는 미래의 스웨덴의 왕비가 될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딸을 주려는 가문이 있었습니다.
칼 14세 요한이 고른 신부 후보는 모두 네명이었는데, 덴마크 공주,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의 딸,헤센 선제후의 딸, 작센-바이마르 대공의 딸이었습니다. 넷다 스웨덴에 중요한 혈연 관계가 되어줄 가문의 사람들이었는데 덴마크는 오래된 왕가중 하나였습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어머니도 덴마크 공주였죠. 헤센 가문 역시 오래된 왕가였을뿐만 아니라 덴마크왕가와 통한하던 가문중 하나였습니다. 작센 가문 역시 오래된 왕가였을뿐만 아니라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대공비는 러시아의 여대공으로 역시나 중요한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칼 14세 요한이 선택한 며느리감은 바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의 딸이었습니다. "조제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성은 칼 14세 요한의 며느리가 되기 적당한 여성이었습니다.
조제핀이라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은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관계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외젠 드 보아르네로 조제핀의 아들이자 나폴레옹의 양아들이었죠. 칼 14세 요한은 아마도 외젠 드 보아르네와 그의 아내인 아우구스테를 잘 알고 있었으며 어린 조제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이유가 같은 "벼락부자"가문의 여성이라서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조제핀의 외가때문이었죠. 조제핀의 어머니였던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는 바이에른의 공주로 그녀의 아버지는 바이에른의 초대국왕이 되는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였습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모든 영지를 상속받은 인물이었기에 아우구스테 역시 매우 오래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왕위계승자를 찾고 있을때 외젠 드 보아르네에 대해서 그는 국왕감은 아니지만 "그의 아내는 왕비감으로 적당하다"라고 이야기 할 정도의 여성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제핀의 큰이모인 카롤리네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의 황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모들 역시 다 정략결혼으로 여러 왕가의 후계자들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오스카르는 음악적 재능이 있고 자유주의를 지지했던 스웨덴에서 인기 있던 왕자였습니다. 물론 인기가 넘쳐서 결혼전에 여자도 넘쳐났었습니다. 오스카르는 선을 보러 다녀야했는데, 조제핀을 만났을때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아름다웠던 조제핀은 오스카르와 마찬가지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둘은 음악에 대한 공통 관심사등으로 서로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결국 오스카르는 조제핀과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
1823년 6월 19일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의 왕태자인 오스카르와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은 결혼을 합니다. 조제핀은 스웨덴에서 "요세피나"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녀는 나폴레옹의 양손녀이기도 했기에 이름에 "나폴레온느"라는 이름이 들어갔는데, 스웨덴의 반 나폴레옹 정서때문에 그 이름을 빼야했다고 합니다.
오스카르와 요세피나의 결혼은 베르나도트 가문의 후손들이 유럽 왕가와 직접적 혈연관계가 되는 중요한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모계지만 요세피나는 스웨덴의 옛 왕가의 후손이기도 했으며 이때문에 요세피나의 후손들은 스웨덴의 국왕들을 선조로 가질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결혼 한번으로 벼락부자 꼬리표를 뗄수는 없었으며, 이때문에 스웨덴 왕가는 매우 엄격한 예법이나 결혼 규칙을 통해서 다른 왕가에 얕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결국 이런 노력은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여러 왕가들 역시 스웨덴 왕가를 인정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테면 현 스웨덴 국왕의 증조할머니는 독일 황제의 외손녀이고, 할머니는 영국 여왕의 손녀였습니다.
더하기
재미난 것은 이전까지 스웨덴 왕가는 매우 엄격한 귀천상혼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 "벼락부자"라는 꼬리표때문이었죠. 하지만 현 스웨덴 국왕은 평민출신의 왕비와 결혼했고, 제1왕위계승자인 빅토리아 공주의 남편 역시 그냥 평범한 스웨덴 시민입니다. 또 마들렌 공주나 칼 필립 왕자의 배우자들 역시 귀족 출신이 아닙니다. 한때 왕족들이 귀족출신과도 결혼 할 수 없었던 상황에 비하면 현재는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