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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un 13. 2016

내가 임신한것이 의심스러워? 그럼 애 낳을때 와서 봐!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마을 광장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애를 낳다!

어느 나라건 어느시대건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가 늘 있기 마련입니다.12세기의 이탈리아 남부지방도 그랬습니다.


12세기 이탈리아 남부 지방은 "시칠리아 왕국"이라고 불리던 왕국에 의해 통치되고 있습니다. 이 시칠리 왕국은 오래오래도록 명칭이 이어지지만 그 왕국을 통치하던 가문들은 몇번 바뀌게 됩니다. 어쨌든 그것은 후대의 이야기이죠


이 시칠리아 왕국을 세운 사람은 시칠리아 백작 지위를 가지고 있던 로게르 2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번결혼했으며 여러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아내가 임신한지 3주만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여덟달후인 1154년 11월 로게르 2세의 막내딸인 콘스탄자가 태어납니다.


연대기 작가가 그린 로게르 2세의 죽음,  옆의 여성이 로게르의 아내이고 안고 있는 아이가 콘스탄자라고 추정하지만, 실제로는 콘스탄자는 태어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로게르 2세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으며 그 아들에게는 후손이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콘스탄자가 태어났을때는 그렇게 중요한 왕위계승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자가 성인이 된  한참 뒤,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을 가진 남성 후계자들 중에 적자들이 점차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정식 아내의 딸이었던 콘스탄자가 계승권을 가진 사람으로 점차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결국 이런 콘스탄자의 계승권은 중세시대 많은 여성들 처럼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콘스탄자는 만 30살이 다 되었던 1184년 10월 한 남자와 약혼합니다. 그녀의 약혼 상대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라고 불렸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둘째아들이었던 하인리히였습니다. 콘스탄자의 남편이 되는 하인리히는 콘스탄자보다 11살이나 어렸습니다. 그리고 둘은 2년후인 1186년 결혼합니다.


하인리히와 콘스탄자


콘스탄자의 결혼에 대해 시칠리아 귀족들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콘스탄자가 중요한 계승자였는데 그녀의 남편은 외국인이었으며, 중세시대는 여성의 권리를 대신해서 남편이 권리를 행사하던 시기였기에 결국 시칠리아 왕국에 외국인 국왕이 관여하는 상황으로 흐를수 있다는 우려때문이었습니다. 콘스탄자는 시칠리아 왕국의 정당한 상속자로 여겨지긴했지만, 이런 상황 때문에 콘스탄자의 조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시칠리아 귀족들은 다른 인물을 국왕으로 내세우게 됩니다. 시칠리아 귀족들은 콘스탄자의 조카였던 아풀리아 공작 로게르 3세의 사생아 아들인 탄크레디를 국왕으로 지지했었습니다.


1191년 시아버지인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한뒤, 콘스탄자의 남편인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로 즉위하면서, 콘스탄자도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하인리히가 황제가 된 뒤 콘스탄자와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여전히 왕위계승문제는 복잡하게 흘렀지만 결국 시칠리아의 왕위는 콘스탄자와 그녀의 남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자, 1196년


그리고 콘스탄자는 비슷한 시기에 임신하게 됩니다. 후계자를 낳는 의무가 있는 왕가의 여성이 임신하는 것은 기뻐해야할 일이었습니다만 문제는 콘스탄자는 1194년에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40살에 가까운 나이에 임신한 콘스탄자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콘스탄자의 임신이 사실인지 의심을 하게 됩니다. 중세시대에는 이미 30대 중반이면 "할머니"라고 취급받던 시기였기에, 콘스탄자가 임신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고 여겼었죠. 아마도 왕위계승문제때문에 다툼이 있었기에 콘스탄자의 임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쑥덕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이를 가졌다고 이야기하면서 몰래 아이를 들여와서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려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또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콘스탄자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잘못하면 자신의 아들이 적자로 인정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이자 시칠리아 여왕의 아들로 이 두개의 영지를 물려받을 아들이 출생때부터 의심을 받는것은 용납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자는 산달이 가까워오자 마을 광장에 산실을 설치하도록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낳는것은 모든 사람들이 와서 보고 증인이 되도록 했던 것이었죠. 사실 19세기까지도 왕실 여성이 아이를 낳을때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을 확인시키기 위해 귀족들이 입회하던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도 아이가 왕비가 낳은 정당한 아이라는 것을 확인 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을 광장에서 아이를 낳는 콘스탄자


1194년 11월 콘스탄자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았습니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처럼 마을광장에서 아들을 낳았는지는 정확한 문서는 전해져 오지 않습니다만, 실제로 마을 광장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이를 낳았는지 아무도 콘스탄자의 아들의 출생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프리드리히"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리고 후에 아버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위와 어머니의 시칠리아 국왕 지위를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그가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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