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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un 27. 2016

근친결혼은 합스부르크 가문만 하는 것이 아니야!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4세 아들들의 결혼

결혼을 통해서 에스파냐의 왕위를 얻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래도록 근친결혼을 하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인정한 에스파냐의 왕위계승서열때문이었습니다.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했기에, 딸들이 다른 가문으로 시집갔을 경우, 에스파냐에서 남성 직계 후손이 단절될경우, 다른 가문에서 에스파냐 왕위를 얻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가계도


하지만 이런 근친결혼은 도리어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문의 남성 직계를 단절시켰다고 알려지게 됩니다. 결국 펠리페 4세의 아들이었던 카를로스 2세는 후계자를 두지 못했으며, 에스파냐 왕위는 카를로스 2세의 누나이자 프랑스의 왕비였던 마리아 테레사(마리 테레즈)의 손자였던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펠리페 5세, ..== 에스파냐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주걱턱이 필수인걸까요...


앙주 공작 필리프는 에스파냐의 국왕이 되면서 펠리페 5세가 됩니다. 그는 에스파냐의 왕위계승법을 바꾸는데, "세미 살리카법"이라는 형식으로 바꾸게 됩니다. 세미살리카법이라는 계승 방식은 남성 직계가 단절될 경우 가문의 방계 가문의 남성 후계자를 찾고 그래도 후계자가 없을 경우 가장 가까운 여성 계승자의 남성 후손을 내세우는 방식입니다. 프랑스 왕가는 살리카법을 계승 법률로 인정하고 있었는데, 필리프 역시 프랑스 왕가 출신이었기에 살리카 법을 따르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여성 계승자의 남성 후손"으로 에스파냐 국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결국 세미 살리카법을 따르기로 한것이었습니다.


펠리페 5세의 후손들은 에스파냐 국왕, 나폴리와 시칠리의 국왕, 파르마 공작등이 되면서 각각의 분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랑 통혼하게 되는데 에스파냐쪽은 주로 프랑스나 포르투갈과 통혼했고 이탈리아쪽은 합스부르크가문과 통혼하게 됩니다.


나폴리와시칠리의 페르디난도 4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도 4세는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3세의 아들이고, 미라아 카롤리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입니다.


그런데 이런식의 통혼은 에스파냐 왕가가 어쩔수 없이 다시한번더 근친결혼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종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에 가톨릭 왕가들은 주로 가톨릭 왕가들과 통혼하길 원했습니다. 결국 이 상황은 가톨릭 왕가였던 합스부르크 가문, 에스파냐 왕가,포르투갈 왕가, 프랑스 왕가, 이탈리아의 여러 통치가문들이 서로 통혼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이전부터 이미 계속 통혼해오던 상황에서 점차 더 가까운 친척관계에 이르게 되게 됩니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이후, 유럽 전역은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가까운 친척들끼리 동맹을 맺기 위해 결혼하는 것은 더 흔한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펠리페 5세의 손자이고, 카를로스 3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4세는 사촌이었던 파르마 공작의 딸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런데 둘의 자녀들중 성인으로 성장한 세아들들은 모두 자신들의 외조카와 결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처음에는 둘째아들이었던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누나이자 포르투갈의 왕비였던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딸인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결혼합니다. 그 뒤에 막내아들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가 역시 누나이자 양시칠리의 왕비였던 마리아 이사벨의 딸인 루이사 카를로타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를로스 4세의 장남이었던 페르난도 7세는 세명의 아내를 잃은뒤 마지막으로 네번째 아내는 역시 여동생이었던 마리아 이사벨의 딸이자 루이사 카를로타의 여동생이었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했습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들 (고야),왼쪽의 세명의 소년들이 모두 카를로스 4세의 세아들들입니다.


페르난도 7세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사이에서 두명의 딸을 얻는데, 그는 딸이 태어나기 직전 "여성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다시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뒤 딸인 이사벨이 이사벨 2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거의 5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카를리스트의 내전"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사벨 2세는 계승권을 확고히하기 위해 사촌이었던 카디스 공작 인판테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와 결혼합니다. 에스파냐의 왕위계승권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므로써 그녀의 후손은 모계는 물론 부계로도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을 물려 받게 됩니다.


이사벨 2세와 남편인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이때문에 이사벨 2세의 아들인 알폰소 12세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거의 에스파냐-합스부르크 만큼이나 심한 근친결혼으로 태어난 후손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사벨 2세의 아들인 알폰소 12세의 가계도


더하기

당대 많은 사람들이 알폰소 12세의 친아버지가 카디스 공작이 아니라 이사벨 2세의 근위장교였던 사람이라고 추정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왕의 남편인 카디스 공작이 동성연애자거나 아니면 성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가질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자 의심을 하게 된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왕위를 두고 숙부인 몰리나 백작과 그 후손들과 다투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여왕의 아이들의 친부가 다른 사람이라는 소문은 에스파냐 전역에 파다하게 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여왕의 남편인 카디스 공작은 아이들을 모두 자신의 친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어

(가계도는 제가 그림-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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