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는 얼굴에 화살을 맞고도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헨리 4세와 메리 드 분의 아들로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손자이기도 했습니다. 헨리 5세는 아버지인 헨리 4세가 사촌인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면서 왕위계승자로 웨일즈 공 칭호를 받게 되죠.
하지만 잉글랜드는 안정되지 못했 여러곳에서 헨리 4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웨일즈 지방 역시 잉글랜드의 불안정한 상황에 맞추어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반란을 시도합니다. 이에 웨일즈 지방의 수장이었던 웨일즈 공 헨리가 이에 맞서게 됩니다. 그는 이때 열다섯살이 안된 나이였죠. 이런 반란은 여러지역으로 번져나갔고 웨일즈공은 웨일즈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데도 참가하게 되죠.
1403년 16살의 웨일즈공 헨리는 노섬벌랜드 백작과 그의 아들이 일으킨 반란군과 슈르즈버리에서 전투를 치루게 됩니다. 이 전투가 "슈르즈버리 전투"라고 불리는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여러가지 의의가 있는 전투인데 특히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잉글랜드땅에서 싸운 첫 전투라고 합니다. 이때 장궁병의 위력은 매우 컸는데 기록에 따르면 병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져갔다라고 묘사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헨리 역시 얼굴에 화살을 맞게 됩니다. 15세기에 얼굴에 화살을 맞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죠.
하지만 16살의 헨리는 이 부상에서 살아남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헨리가 살아남을수 있었던 것은 당시 왕가의 외과의로 일하던 존 브래드모어(John Bradmore)의 공이 컸습니다. 그는 웨일즈공의 치료에 대한 기록인 Philomena를 남겼으며 이때문에 현재 우리는 그가 어떻게 웨일즈공을 치료해서 살렸는지에 대해 알수 있습니다.
브래드모어가 웨일즈 공에게 가기전 다른 이들이 웨일즈공의 얼굴에서 화살을 뽑으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살촉은 너무 깊게 박혀있었으며, 브래드모어가 도착하기 전까지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었습니다. 브래드모어는 웨일즈 공의 상처를 살펴봤으며 그의 상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웨일즈 공은) 슈르즈버리 전투동안 왼쪽 코옆을 화살에 맞았다. ... 화살을 빼낸후에도 화살촉은 6인치 깊이의 두개골 안쪽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상처를 본 브래드모어는 화살촉을 빼내기 위한 방법을 고안합니다. 먼저 그는 상처를 충분히 벌려서 상처로부터 화살촉의 상태를 확인할만큼 만듭니다. 이 작업에는 잘말리고 정제된 린넨에 꿀을 발라서 상처에 집어넣어서 상처를 넓힙니다. 그리고 화살촉을 꺼내기 위한 특별한 장치를 고안합니다. 스크류가 달려있는 이 장치를 통해서 화살촉을 집어서 빼내려한것이죠. 이미 충분한 크기로 벌려놓은 상처에 이 기구를 집어넣어서 화살촉을 빼냈으며 성공하게 됩니다.
화살촉을 빼낸뒤 브래드모어는 상처를 백포도주로 소독했으며 상처 구멍에 보리,밀,꿀,아마섬유를 혼합한것을 집어넣어서 밀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21일간 매일 상처에 새로 소독하고 새로운 혼합물을 갈아넣었으며 결국 웨일즈공은 부상에서 회복하게 됩니다.
브래드모어의 치료는 매우 효과적이었는데 특히 화살을 빼내는 독창적 기구를 제작한것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후속 치료 역시 효과적이었는데 화살촉을 효과적으로 빼냈더라도 감염으로 죽는 경우가 흔했던 시절에 브래드모어의 후속 치료는 상처에 감염을 막는 중요한 치료였었기 때문이죠. 웨일즈공은 다음해동안 이 상처에서 회복하느라 거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상처에서 회복되게 됩니다. 그리고 브래드모어는 웨일즈공을 살린 공으로 죽을때까지 연금을 받게 되죠.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