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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12. 2015

남편도, 아버지도, 여동생도 다 도움이 안돼!

가벼운 역사  이야기... 열여섯번째

이슬람이 끼어들면서 더 복잡해진 중세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중세가 끝나는 에스파냐 통일 직전까지 계승권 때문에 매우 복잡한 상황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교도와의 전투"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좀 복잡했던데다가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이 서로 통혼을 통해서 혈연으로 연결되면서 왕위 계승권을 주거나 받거니 해서 결국 이 나라들의 왕족들 모두가 어느 정도 공평하게 왕위 계승권을 가지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베리아 반도는 역시나 변방(!!)이라서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아서 딸들에게도 공평하게 계승권을 줬기 때문이었죠. 물론 이런 나라들은 보통 딸들이 시집 갈 때면 지참금 많이 주면서 계승권을 포기하고 가게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결혼에 교황의 사면장이 늘 필요할 정도로 근친 간 결혼이었고 이런 상황은 결국 왕위 계승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거나 내전을 하거나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여기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블란카(또는 블랑쉬)"였죠. 그녀는 복잡한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나바라의 공주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어머니는 나바라 왕국의 상속녀였던 블란카 1세였죠. 그녀의 아버지는 아라곤의 인판테(왕자)였던 후안이었습니다. 후안은 블란카와 결혼함으로써 아내의 권리를 들어 나바라의 공동 국왕이 된 인물이었죠. 후안은 아라곤 국왕의 아들이긴 했지만 사실 따져보면 아라곤 왕가는 카스티야 왕가의 분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블란카는 나바라 여왕의 딸이자 아라곤 국왕의 손녀였고 카스티야 국왕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나바라의 블란카



블란카는 1440년 평화조약의 일환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아스투리아스 공"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가 카스티야의 국왕이 되는 엔리케 4세였죠. 둘은 친척관계였는데 블란카의 아버지인 후안은 엔리케의 아버지와 사촌관계였기에 둘은 육촌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엔리케의 어머니는 블란카의 고모였기 때문에  사촌간이기도했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친척간의 결혼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허락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몇몇 예에서 보면 이만큼도 아니고 한 팔촌 관계임에도 수도원 짓고서야 결혼을 허락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이베리아 반도 쪽 왕가에 자주 너그러웠는데 유럽의 서쪽에서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 왕가들에게 너그러울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동쪽에서 막아내고 있던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고 여기도 만만치 않게 근친 결혼했는데도 허락해주게 되죠.)


하지만 블란카의 삶에서 가족들은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블란카의 남편인 엔리케 4세는 아스투리아스 공 시절부터 카스티야에서 권력을 유지하던 "아라곤의 인판테"들을 경계해왔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투까지 했었습니다. 엔리케 4세의 아버지가 어려서 즉위하면서 친척이었던 아라곤 왕자들이 카스티야의 정치에 관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블란카의 아버지인 후안도 있었죠.

아마 이런 정치적 문제는 엔리케 4세가 블란카의 아버지인 후안을 경계하고 또 블란카 역시 그다지 탐탁지 않아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결국 엔리케는 결혼한 뒤 십여 년 뒤에 블란카와 결혼 무효를 선언하게 됩니다. 이 당시 이슬람 세력과 마지막으로 대치하고 있던 카스티야였기에 교황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무효화를 선언해주는데 , 둘의 결혼 무효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는 "블란카가 마녀행위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블란카와 그녀의 원수 같은 남편이 이혼한 진짜 이유는 "결혼이 성립되지 않아서였죠". 다시 말하면 신랑은 신부와 결혼한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잠자리를 같이 한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적 검진을 통해서 이것은 확인된 사실이기도 했죠. 하지만 이대로 공표한다면 많은 이들이 정부조차 없었던 엔리케가 아내와 동침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말이 많을 것이기에 공식적으로 공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블란카는 꽃 같은 나이를 허송세월 하느라 카스티야에서 다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블란카의 남편 앤리케4세




하지만 블란카의 고향인 나바라에서는 더 복잡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후안은 아내인 블란카가 죽고 난 뒤에도 나바라의 왕위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죠. 후안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어야 하는 아들의 정당한 권리를 거부하고 여전히 자신이 국왕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열 받은  아들은 아버지와 전쟁했지만 패배했고  그냥 아버지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비록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기로 약속되어있었지만 아버지보다 일찍 죽음으로써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오빠가 죽은 뒤 블란카는 자연히 두 번째 자녀이자 첫째 딸로 왕위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블란카와 그녀의 지지자들은 아버지 후안을 제치고 그녀 스스로가 나바라의 국왕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게다가 딸네미를 프랑스의 왕자와 결혼시켜서 멀리 보내버리고 프랑스와의 동맹도 확보하려 했던 아버지 후안의 계획에 대해 블란카는 보기 좋게 거절해버렸기에 아버지 후안 역시 열 받은 상황이 되죠.

결국 후안은 딸을 사로잡았으며 자신을 통치자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딸을 감옥에 가뒀는데 그 책임자는 블란카의 여동생인 레오노르였습니다.


블란카의 아버지 후안, 나바라의 국왕 후에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국왕, 가톨릭 공동군주인 페르난도의 아버지




블란카의 여동생인 레오노르는 푸아 백작과 결혼해서 자녀들이 줄줄이 있었으며 언니 블란카만 없다면 왕위를 이어받을 중요한 시점이었죠.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인 후안은 아라곤의 국왕이 되면서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정했기에, 레오노르는 어쩌면 아버지가 자신이 아니라 페르난도에게 나바라의 왕위도 물려주려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레오노르의 문장




결국 블란카는 1464년 12월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그녀의 죽음은 독살로 추정되며 아버지인 후안이나 여동생으로 후안의 지지자이자 다음 왕위 계승자였던 레오노르 둘다가 범인으로 의심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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