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열다섯번째
서양의 동화중에 라푼젤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라푼젤 이야기는 대충 마녀가 라푼젤을 탑 속에 가둬놓고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못 만나게 했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왕자님을 만난 라푼젤이 사랑에 빠지고 결국 마녀를 속이고 탑에서 탈출해서 왕자님을 찾아가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죠.
라푼젤 이야기는 사실 딸가진 부모와 연애질 하려는 어린 딸의 이야기를 비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녀는 라푼젤을 누구도 못 만나게 탑에 가두지만 결국 라푼젤은 탑을 떠나 왕자님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니까요.
가끔 유럽 왕족들 이야기에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엄마가 딸들을 놔주지 않아서 딸들이 노처녀로 늙는 경우가 많습니다. 왕족들 이야기에서는 딸들이 라푼젤처럼 행복을 찾는 것은 더 쉽지 않죠.
빅토리아 여왕도 이런 라푼젤 이야기와 매치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막내딸인 베아트리스 공주의 경우죠.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이 죽은 후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시기에 어머니, 외삼촌등도 죽었기에 이런 공포가 심해졌죠. 남편이 죽은 후 여왕은 자녀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게 됩니다. (물론 장남인 버티는 제외했을듯합니다) 특히 딸들이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여겼죠.
앨버트 공이 죽은 직후 여왕을 돌본 사람은 둘째 딸인 앨리스였습니다. 무척이나 헌신적으로 어머니를 돌보고 동생들을 다독였습니다. 하지만 앨리스는 약혼상태였고 여왕은 떠나보내기 싫었지만 남편인 앨버트가 결정한 혼담이었기에 딸을 멀리 독일로 시집 보냈었습니다. 물론 앨리스가 바로 독일로 간 것은 아니었고 또 자주 어머니 곁에 돌아와서 머물렀었죠.
이후 여왕을 돌본 사람은 셋째 딸인 헬레나였습니다. 헬레나는 순종적이고 얌전한 성격이었고 게다가 외모도 그다지 예쁘지 않았기에 여왕은 헬레나가 평생 자신만을 돌보면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헬레나는 사랑에 빠졌고 가문에 분란을 일으키면서 결혼식을 올리죠. 헬레나가 선택한 사람은 잘생긴 외모도 아니었고 가난했으며 영지조차 없었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크리스티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와의 결혼은 복잡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영국 왕가가 한번 더 끌려들어갈 수도 있었기에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었으며 또한 가족 내에서 덴마크 공주와 결혼한 오빠 웨일스공과 독일 황태자와 결혼한 언니 프린세스 로열 사이의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죠.
하지만 헬레나는 크리스티안과 영국에서 사는 조건으로 결혼했습니다. 여왕은 딸이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가정이 생긴 헬레나의 첫 번째 순위는 홀로 된 어머니가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이었죠.
헬레나에게 실망한 여왕은 다음 딸인 루이즈에게 눈길을 돌립니다만, 어린 시절부터 여왕의 자녀들 중 가장 문제아였으며 반항아였던 루이즈는 어머니 곁에 머무는 것을 싫어합니다. 루이즈는 결혼 전부터 이미 어머니 곁에만 머무는 것을 싫어했고 "숨 쉴 수 있게" 예술학교를 다니도록 허락받기도 합니다. 여왕은 루이즈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죠. 그리고 루이즈도 아가일 공작의 아들인 론 후작과 결혼해서 어머니 곁을 떠나죠.
이렇게 되자 여왕에게 남은 자녀는 막내딸이자 특별히 편애했던 딸 베아트리스밖에 남지 않습니다. 여왕은 베아트리스 마저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을 우려했고, 절대 결혼 등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베아트리스가 읽는 책들 마저 여왕이 관여했고, 어린 딸에게 무리한 일거리를 줘서 다른 생각을 못하게 했습니다. 특히 베아트리스가 결혼에 대한 꿈을 꾸지도 않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왕이 베아트리스가 결혼하기 전 딸의 혼담에 흥미를 보인적이 한번 있었는데 바로 둘째 사위인 헤센 대공과의 혼담이었죠. 여왕은 자주 영국에 머물렀으며 장모 말에 매우 순종적이었던 이 사위를 좋아했기에 앨리스가 죽은 후 베아트리스를 그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에 매우 흥미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 영국 법률상 죽은 언니나 여동생의 남편과 결혼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이죠.
베아트리스는 세상과 단절되어서 여왕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고, 가족들은 베아트리스가 독신으로 살면서 어머니를 돌볼 것이라 여겼죠. 그리고 실제로 노처녀로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언니 오빠들이 다 결혼하고, 조카들이 결혼하는 시점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큰언니 빅키가 열여섯 살에 약혼했던 것에 비하면 베아트리스는 28살에 결혼했으니까요.
하지만 베아트리스도 곧 자신의 왕자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아트리스가 만난 왕자님은 베아트리스의 조카인 헤센의 빅토리아의 시동생인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였습니다. 잘생긴 걸로 이름 높았던 바텐베르크 가문 사람 중 한 명이었죠. 게다가 그는 베아트리스보다 한 살 어렸습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바로 왕자님을 위해 머리카락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베아트리스가 하인리히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여왕은 매우 화를 냈으며 베아트리스와 신경전을 시작합니다. 여왕이 화났을 때 남편이 의사 소통하던 방식이었던 쪽지로 대화하기 시작하죠. 어머니와 딸과의 신경전은 무려 6개월간 지속됩니다. 여왕은 베아트리스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늘 쓰던 일기에서도 베아트리스에 대한 언급을 빼버릴 정도였죠. 베아트리스 역시 이번 기회를 놓치면 결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절대 물러서지 않습니다.
결국 이상황을 보다 못한 가족들이 중재하기에 이릅니다. 가족들 중에 가장 다정다감한 성격이자 여왕에게 가장 호의를 얻을 수 있었던 두 명의 가족들이 나섰는데 여왕의 큰며느리인 웨일스 공비 알렉산드라와 여왕의 막내며느리이자 과부가 되었던 알바니 공작부인이었죠. 이들은 여왕에게 베아트리스 공주의 결혼을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여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말입니다.
이에 여왕은 하인리히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국에 와서 살며, 베아트리스가 결혼 후에도 결혼 전과 같은 생활을 한다면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하죠. 첫 번째 조건은 헬레나와 같은 것이었지만, 두 번째 조건은 헬레나가 자신보다 남편과 아이들을 우선한 것을 보고 내건 조건이었죠.
결국 베아트리스와 하인리히는 여왕의 조건을 승낙하였고 결혼합니다.
베아트리스는 결혼 후에도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곁에서 개인비서일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돌본 것은 주로 남편인 하인리히였습니다. 결혼 전 그렇게나 반대했던 여왕의 모습과 달리 결혼을 허락한 직후부터 여왕은 사위에 대한 자랑이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여왕이 가장 예뻐한 사위가 되죠.
라푼젤이야기에서 라푼젤은 마녀에게서 도망가서 왕자님과 행복하게 삽니다만, 베아트리스 공주는 왕자님과 함께 어머니에게 붙잡혀서 평생 살게 되었답니다.
그림출처
위키 피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