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청나라의 순치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2세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이 알려졌을때, 많은 이들이 이들의 죽음을 믿지 않고 살아있었을 것이라 여겼다는 겁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종교에 몰입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문에 20년동안 함께 살았던 정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평생 외롭게 지내게 만들었던 아내인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황후에게 돌아갔었습니다. 황후는 어머니에게 "제가 남편의 정부가 된것같아요"라고 편지를 보낼정도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종교에 몰입하게된 근본적 원인은 아버지 파벨1세의 죽음에 대한 책임과 제어불가능인 귀족세력때문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자주 '무거운짐"인 황위에서 물러나고 싶어했지만, 그의 후계자가 될 동생들은 이 일에서는 황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죠. 어쨌든 황제는 제2의 신혼을 누리던 황후와 함께 흑해로 요양을 떠나기로 합니다. 황후가 너무나 병약했기 때문에 황후를 위해 따뜻한 흑해 연안으로 가기로 한 것이었죠. 몇몇이야기에 따르면 황제는 흑해로 떠나기 전날, 울면서 기도했으며 정교회 대주교에게 축복을 간구해다고 전해집니다.
얼마후 흑해연안으로 간 황제 부부에게서 죽음의 소식이 전해져 옵니다. 병약해서 곧 사망할 것 같았던 황후가 아니라 건강했던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었죠. 사실 황제가 황위를 떠나고싶어했었던 것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기에 황제의 사망소식이 수도에 도착했을때 황제가 사실 죽지 않고 은둔했다는 소문 역시 같이 도착했을 정도였습니다.
이후 이야기들은 다른 많은 이야기들처럼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러시아 황실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황제의 시신은 생전 모습과 너무나 달랐으며, 황제의 관이 닫혀있어서 황제의 죽음을 정확히 확인할수 없었다로 시작해서 시베리아의 한 은둔성자 이야기로 끝을 맺게됩니다.
훗날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는 시베리아의 은둔 성자인 성 표도로 코즈무치가 과연 알렉산드르 1세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알렉산드르 1세는 1825년 12월 흑해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청나라의 순치제는 어린시절 황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오래도록 권력자이자 숙부였던 도르곤의 영향아래 있었습니다. 순차제 역시 정치를 좀 힘들어했을수도 있지만 그의 죽음과 이후 이야기는 알렉산드르 1세보다는 많이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순치제와 그의 아버지인 청태종은 둘다 순정파였다고 합니다. 순치제가 사랑한 여성은 동악비였습니다. 그녀는 황제의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이는 얼마 살지 못했고 얼마뒤 그녀마저 죽게 되죠. 순치제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동악비가 죽은 다음해에 천연두로 사망합니다.
하지만 순치제가 사실 죽은것이 아니라 동악비의 죽음에 충격받아서 출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 널리 퍼진 이야기로 많은 드라마들에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을정도죠. 정말 출가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어쨌든 순치제도 공식적으로는 1661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강희제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천연두를 앓아서였다고도 합니다.
알렉산드르 1세와 순치제 같은 인물이 잉글랜드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르 1세처럼 정치에 싫증난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순치제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서 좌절한것도 아니었죠. 그는 정치투쟁에서 패배했고 이 때문에 왕위에서쫓겨나야했던 인물로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2세였습니다.
"Edward of Caernaforn, Son of Edward of England , King of England. Prince of Wales. Lord of Ireland, Duke of Aquitaine"
이라고 불리웠던 이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에 비해서 "찌질하다"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가 강력한 기사이자 군주였던것에 비해 에드워드 2세는 전쟁보다는 건축술등 당시 국왕이 갖추어야할 덕목이라기에는 좀 애매한 것에 열정을 쏟았기 때문일듯 합니다. 게다가 에드워드2세와 그의 총신들과의 관계 또한 그의 "찌질한 이미지"를 증대시켜주는데 많은 학자들이 에드워드 2세가 그의 총신들과 동성연애를 즐겼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가 총신들에게 과한 권력을 부여한 것이 이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그가 귀족들과의 권력투쟁한것 자체만으로도 부정적 이미지를 가져왔으며, 부인인 이사벨라 왕비가 그녀의 연인과 반란을 일으켜서 왕위를 뺏은것조차 어느정도 정당화되는 분위기입니다.
어쨌든 에드워드 2세는 이사벨라와 로저 모티머의 군대에 패배했고, 에드워드는 왕위를 뺏기고 버클리성에 감금됩니다. 공식적으로 에드워드 2세는 1327년 9월 21일 버클리성에서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지만 사실 그는 약 20일 후에 이사벨라와 모티머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이런 사망시기에 대한 모호함은 결국 후대에 까지 에드워드 2세가 죽지 않고 도망갔다는 소문을 돌게 하죠.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에드워드 3세때 한 수도원의 수사가 쓴 기록으로 그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이사벨라와 모티머가 보낸 자객들을 피해 살아남았으며 이탈리아로 도망가서 1340년까지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사벨라 왕비의 전기를 쓴 앨리슨 위어는 이 이야기를 지지하고 있죠. 또 다른 학자는 적어도 에드워드 2세가 1330년까지는 생존해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2세가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1327년 공식적으로 그의 죽음이 공표되었으며 장례식도 치뤄졌습니다.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는 1330년 친정을 하게 되었고 그는 정치적으로 가장 큰 위협이었던 어머니와 로저 모티머를 제거합니다. 에드워드3세는 어머니는 살려주고 모든 책임을 로저 모티머에게 전가해서 그를 처형합니다. 로저 모티머의 죄목들 중에는 에드워드 2세의 살해도 포함되어있었죠.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