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2월 에스파냐 군부의 쿠데타 시도
현 에스파냐 국왕인 펠리페 6세는 후안 카를로스 전국왕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후안 카를로스는 건강상의 이유로 양위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딸 부부의 뇌물스캔들과 본인의 불륜과 호화여행등이 문제가 되어서 에스파냐 왕실의 지지도가 곤두박질 칠 위험때문에 양위한 것입니다.
(조금더 나아가는 뒷담화에 따르면 후안 카를로스는 아내인 소피아 왕비와 이혼하고 문제가 된 여자친구랑 결혼하고 싶어한대나 어쩐대나 그런 소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 가십거리로 전락한 후안 카를로스였지만 젊은시절 그는 에스파냐 정치사에서 큰 획을 긋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의 용기있는 행동은 그와 에스파냐 왕실이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명예스럽게 양위하긴했지만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에스파냐에 민주화를 도입한 국왕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크죠.
후안 카를로스는 에스파냐의 국왕 알폰소 13세의 손자이자 유일한 "적법한 후계자"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왕위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는데 알폰소 13세의 셋째아들인 후안만이 이 조건을 충족했었으며, 후안 카를로스는 그의 장남이었습니다.
에스파냐는 오래도록 프랑코의 독재체제였었는데, 프랑코가 나이가 들면서 후계자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코는 에스파냐 왕가의 후계자였던 후안 카를로스와 그의 동생을 에스파냐로 돌아오게 해서 교육시켜서 자신의 후계자 후보로 만들게 됩니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 밑에서 매우 조용하게 살았는데, 이때문에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가 자신의 정책을 계속 유지할것이라 믿었습니다. 물론 후안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독재에 순응하는 듯한 아들의 행동에 못마땅해했다고 전해집니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했을 것입니다. 이때문에 프랑코의 외손녀가 후안의 사촌과 결혼해서 그의 지위를 위협했을때,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사촌에게 왕실 지위를 부여하게 만드는등 프랑코의 마음에 들려는 듯한 행동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코가 사망한뒤 후안 카를로스는 그의 후계자로 에스파냐의 국왕이 됩니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 독재체제를 뒤엎고 에스파냐에 민주화 작업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 상황은 모두가 당황하는 일이었는데 고분고분할것 같았던 후안 카를로스가 사실 고분고분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었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에스파냐 군부는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음모가 몇번 있었지만 사전이 정보가 흘러나오거나 일이 흐지부지 되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1970년대후반부터 계속적으로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1년 2월 드디어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1981년 1월 독재정치를 지지하는 줄 알았지만 후안 카를로스 밑에서 개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수상 수아레스가 사임을 했습니다. 그리고 2월 23일 수아레스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해 의회에 의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중령인 안토니오 테헤로(Antonio Tejero)가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하원에 난입했으며 투표를 위해 모여있던 의원들을 인질로 잡습니다. 그리고 발렌시아 군의 사령관이 이에 발맞춰서 자신의 관할 지역에 계엄을 선포하면서 호응하죠. 하지만 당시 군부 전체의 입장은 좀 복잡했는데 군부 전체가 이 쿠데타를 지지한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몇몇은 지지했지만 몇몇은 반응을 보류했으며 몇몇은 국왕과 의회에 충성을 확고히 했고 또 몇몇은 충성을 이야기했지만 쿠데타가 성공한다면 편을 바꿀 가능성이 충분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1년 2월 24일 1시 에스파냐 최고 사령관의 제복을 입은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방송에 나와서 연설을 합니다. 그는 연설에서 자신은 쿠데타를 거부하며 에스파냐 국왕이자 에스파냐 군 최고 통수권자로써 시민과 군인들에게 헌법을 수호하라고 명령을 내린다고 방송합니다.
이 상황은 곧 쿠데타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24일 정오에 의회를 장악했던 인물들이 의회건물 밖으로 나와서 체포되었으며 쿠데타시도에 호응했던 장군들 역시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이 사건은 후안 카를로스를 오래도록 에스파냐의 "영웅"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국왕으로써 쿠데타 세력에 굴하지 않고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의무를 이행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만들었으며 오래도록 존경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에스파냐의 민주화 역시 계속 진행되었죠.
...이랬는데 21세기가 되면서 불륜,호화여행,뇌물수수스캔들(이건 딸이 그랬지만)로 이미지가 영 구겨졌습니다만 뭐 적절한때 양위한것이 에스파냐 왕실에는 도움이 된듯합니다. 펠리페 6세는 일단 문제가 된 누나의 여공작 지위를 박탈하면서 왕실에서도 뇌물수수스캔들에 책임을 지게 한다는 이미지를 보여줬고, 펠리페 6세는 평민의 이혼녀였던 여성을 사랑해서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결혼했기에 아버지의 바람둥이 이미지를 잠재울수 있을것이도 하고 말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