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이야기 : 에티엔 모리스 제랄 (1773-1852)
에티엔 모리스 제랄은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장군으로 이름을 알린 사람입니다. 제랄은 유능한 군인으로 나폴레옹에 의해서 "제랄 백작"지위를 받았었습니다.
왕정 복고후 많은 사람들처럼 제랄도 돌아온 국왕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만,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많은 사람들처럼 나폴레옹에게 돌아갑니다. 제랄은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그루시 장군에게 포격소리가 나는 곳으로 병력을 이동해야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제랄은 많은 나폴레옹의 지지자들처럼 프랑스 입국이 금지되기도 했지만, 1817년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으며, 이후 활발한 정치 활동을 했으며 7월 혁명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유능한 인물이었던 제랄은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해서 장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능한 인물을 알아보는 상관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리고 제랄을 알아본 장군님은 바로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제랄은 젊은 시절 상브르와 뫼즈 군에서 복무하고 있었으며 후에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에게 갈때 따라갔었습니다. 이후 베르나도트가 빈 대사직을 수행하러 갈때, 데리고간 젊은 장교들 중 한명이 바로 제랄이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주는 장군님에게 제랄은 충성스러운 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랄은 이런 장군님 때문에 진짜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되죠.
베르나도트가 빈 대사로 갔을때,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베르나도트는 빈에서 대사직을 수행하고 있을때 공화국의 상징인 삼색기를 밖에 걸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삼색기를 본 빈 사람들이 흥분하게 되는 것이었죠. 결국 빈 사람들이 대사관에 난입하고 대사관에 있던 베르나도트와 참모들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사건은 피를 보지 않고 일단락됐는데, 이후가 더 문제가 됩니다. 베르나도트는 강경하게 삼색기를 걸게해주던지 아니면 빈을 떠나겠다는 편지를 써서 황제에게 보내게 됩니다. 이 편지를 전달하러 간 사람이 바로 제랄이었는데 베르나도트는 공화국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가라고 제랄에게 명했다고 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울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베르나도트는 공화국의 위엄을 더 중요시했고, 제랄은 장군님이 시키는대로 해야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베르나도트와 그 일행은 짐싸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이후 제랄이 베르나도트 휘하에서 여전히 참모로 일한것을 보면 그때 무사히 돌아온 것일듯 합니다.
고지식한 장군님때문에 힘들었던 제랄은 능력있는 장교답게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랄의 장군님은 중간에 스웨덴으로 이민가셨드랬죠. 아마 제랄은 장군님이 이민가셔서 더이상 엮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만 제랄의 장군님은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셨드랩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라이프치히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안겨준 전투로, 열심히 전장에 있었던 제랄은 이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었습니다. 그런데 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스웨덴의 칼 14세요한과 그의 스웨덴 군이었습니다. 바로 제랄의 이민간 옛 장군님이셨던 것이죠.
이런 고생을 했던 제랄에 대해서 제랄의 옛 장군님은 뭐랄까 신경을 쓰셨던듯합니다.
왜냐구요?
이 그림에서 제랄의 가슴 맨 아래쪽에 달린 훈장은 바로 "스웨덴의 검훈장"으로 스웨덴에서 군인들에게 수여하던 훈장이었습니다. 제랄이 뜬금없이 이 훈장을 받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것입니다. 그리고 후에는 스웨덴 왕가의 최고 훈장인 세라핌 훈장도 수여받았다고 하네요.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