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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26. 2017

한 집안 아니랠까봐...

가벼운 역사 이야기 : 14세기 이베리아 반도 왕가들의 막장 스토리!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이 진출했으며, 이후 가톨릭 공동군주가 되는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이 그라나다를 함락 시킬때까지 오래도록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기독교 국가들의 투쟁이 진행된다.

이슬람 세력에 대한 투쟁이 공통 목표이긴 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 성립한 여러 기독교 국가들은 서로를 견제하거나 연합해가면서 점차 세력을 발전시켰다.


복잡한 내부적, 외부적 상황은 이베리아 반도내에 있던 왕가들이 서로 결혼 동맹으로 엮이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여성 상속을 인정했기에 결혼 문제는 기독교 국가 간의 왕위계승문제에 개입할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수 있었다. 이때문에 결혼 문제는 더욱더 정치적인면이 강조 된다.


왕가들의 정략결혼이 강화되면서, 부부간에 사랑없이 결혼하고 살아가야하는 상황이 점차 많아진다. 이렇게 되자 정략결혼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따로 두기에 이르게 된다. 물론 중세 시대는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홀로 행사할수 없던 시기이기도 했기에 여성의 부정은 매우 엄격하게 다뤄졌지만, 남성의 부정은 쉽게 눈감아줬고, 이 결과 이베리아 반도의 국왕들이나 남성 왕족들에게는 수많은 정부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정부들을 사랑한 국왕들의 이야기는 많이 전해져온다. 그중 레오노르 데 구스만이나 이녜스 데 카스트로 그리고 마리아 데 팔딜라의 이야기는 유명한데 재미난 것은 이들 여성들이 사랑했던 남자들인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는 모두 친척간이었으며 복잡다난하게 얽히고 섥힌 족보관계가 존재한다. 물론 이것은 다 정략결혼의 폐해이기도 했다.


이 복잡한 가족관계의 시작은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이다. 카스티야의 국왕인 알폰소 11세는 두번 결혼했는데 첫번째는 비네라의 콘스탄사 마누엘과 했으며 두번째는 포르투갈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알폰소 11세의 첫번째 아내는 카스티야 방계 왕가 출신이었던 비네라 공 후안 마누엘의 딸이었다. 후안 마누엘은 카스티야의 국왕의 손자로 유럽 왕가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과 많은 재산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런 그를 소홀히 할수 없었던 카스티야 왕가는 그의 딸인 콘스탄사 마누엘과 알폰소 11세의 결혼을 추진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폰소 11세는 이 결혼을 깨고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위해 포르투갈의 국왕 아폰수 4세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세력과 전투중인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


알폰소 11세가 포르투갈의 마리아와 결혼하기 직전 그는 한 아름다운 과부를 만나게 된다. 레오노르 데 구스만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어린시절 결혼해서 10대에 과부가 되었는데 알폰소 11세는 이 여성에 반해버리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정식 아내인 포르투갈의 마리아와 결혼한 뒤에도 둘은 계속 연인 관계로 남았으며, 심지어 아내인 마리아를 버리고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 따로 살았을 정도였다. 이때문에 마리아와의 사이에서는 두명의 자녀밖에 없었지만 레오노르 데 구스만 사이에서는 무려 10명의 아이를 낳고 살았고, 이런 상황은 훗날 마리아의 아들이자 알폰소 11세의 적자인 카스티야의 페드로와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 데 구스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 간의 미묘한 왕위계승권 다툼으로 발전하기에 이르게 된다.


처형 직전의 아들을 만나는 레오노르 데 구스만, 알폰소 11세 가 죽은뒤 섭정이 된 포르투갈의 마리아는 결국 레오노르 데 구스만을 처형합니다.


한편 마리아의 아버지였던 포르투갈의 국왕 아폰수 4세는 딸이 이렇게 홀대를 받자 사위에게 화가 났으며, 사위에 대항할수 있는 동맹을 찾게 된다. 바로 알폰소 11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콘스탄사 마누엘의 아버지였던 비네라 공 후안 마누엘이었다. 후안 마누엘은 알폰소 11세가 자신의 딸과 이혼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고 알폰소 11세에게 앙심을 품은 두 사람은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은 두 가문의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폰수 4세의 후계자인 페드루와 후안 마누엘의 딸이자 전 카스티야의 왕비였던 콘스탄사 마누엘이 결혼하게 된 것이었다. 이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는데, 아폰수 4세의 아들로 후에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는 페드루 1세는 콘스탄사 마누엘과 결혼한 뒤, 아내의 아름다운 시녀 한명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이녜스 데 카스트로로, 이녜스 데 카스트로는 카스티야 왕가와 연결되는 가문 출신이었기에 콘스탄사 마누엘의 시녀가 되었던 것이다. 페드루 1세의 아내인 콘스탄사 마누엘이 살아있었을때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페드루는 적어도 매형처럼 아내와 완전히 헤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콘스탄사 마누엘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 문제가 발생한다. 페드루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를 진정한 사랑으로 여겼었으며 그녀와 결혼하길 원했다. 하지만 페드루의 아버지였던 아폰수 4세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가문 사람들이 포르투갈에서 권력을 얻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결국 이녜스 데 카스트로를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페드루 1세는  이 상황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국왕이 될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뒤 페드루 1세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를 자신의 정식 아내로 선포했고 둘의 자녀들을 적자로 인정하면서 왕위계승권리를 인정했었다. 이런 상황은 후에 페드루 1세가 자신의 즉위식때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시신을 왕좌이 앉히고 귀족들에게 그녀가 왕비임을 인정하는 예(죽은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손에 키스하는 등의 행동)를 하도록 했다는 전설을 전해져오게만들었다.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시신에 예를 올리게 하는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


이렇게 사랑에 미친 아버지와 외삼촌을 가지고 있던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 역시 비슷한 길을 가게 된다. 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마리아가 레오노르 데 구스만을 증오했고 결국 레오노르를 처형한 상황에 이른것을 봤지만 그 역시 마리아 데 팔딜라와 사랑에 빠졌고 외삼촌이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다.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 복잡한 카스티야 내전의 주요인물중 하나, 사실 이때 일어난 카스티야 내전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대리전이긴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모두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쌓이게 된다.


이복형제인 페드로 1세를 살해하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 카스티야 내전은 카스티야를 오래도록 분열시키는 계기중 하나였습니다.


....같은 집안 아니랠까봐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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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새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만..저자 서문이 미칠듯이 안써집니다. 이거 말고 저자 서문 써야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금방 쓰는데 진짜 저자 서문은 왜이리 안써지는 걸까요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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