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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an 08. 2018

두 황제의 손녀 두 대공의 아내(3)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 세번째- 결혼

빅토리아 멜리타(더키)는 1894년 4월 17살의 나이로 고종사촌이었던 헤센의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에르니)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가족들의 바램이었는데 사실 둘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긴했지만 결혼할만큼의 연애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결혼은 후손들에게 언제나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던 빅토리아 여왕의 바램이었고, 더키와 에르니는 그야 말로 등떠밀려 결혼했다. 그리고 이 등떠밀려 결혼하는데는 더키의 언니 마리(미시)와 더키의 사촌이었던 웨일즈의 조자와의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했었다.


빅토리아 멜리타와 에른스트 루드비히의 결혼 사진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웨일즈 공의 둘째아들이었던 조지는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영국의 중요한 요충지중 하나였던 몰타섬에 자주 갔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숙부인 에든버러 공작의 집에 자주 머물렀으며  어린 사촌들과 함께 어울렸는데 특히 숙부의 첫째 딸이자 매우 예쁜 소녀였던 마리에게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마리가  혼담이 진행될만한 나이에 이르게 되자 그는 오래도록 알았던 이 예쁜 사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모두가 다 그가 마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정도로 따라다녔다.


에든버러 공작 가족들과 친척들, 개인적으로 마리야가 사윗감으로 여겼을만한 사람은 저기 바덴의 막시밀리안 정도였을 것같습니다.(에르니나 조지는 패스였을듯...)


사실 조지는 둘째아들이었으며 마리는 그때까지도 너무 어렸기에 모두들 둘이 연애나 혼담이야기가 나올려면 멀고먼이야기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때문에 영국쪽이라면 경기를 일으켰던 공작부인 역시 딸과 시조카를 그냥 내버려뒀을 것이다. 하지만 1892년 상황은 갑자기 바뀌게 된다. 20대 중반이었던 조지가 그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을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는 역시 미혼이었던 형인 에디가 있었기 대문이었다. 하지만 1892년 초 에디는 결혼식을 앞두고 인플루엔자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죽자 조지가 제2왕위계승자가 되었으며 할머니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조지는 결혼해야할 의무가 갑자기 생겼다. 그리고 그는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던 마리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들인 웨일즈 공과 에든버러 공작은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하지만 어머니들인 알렉산드라와 마리야 공작부인은 결사반대했다. 특히 마리야 공작부인은 영국을 싫어했고 딸이 영국으로 시집가서 더 복잡하게 얽히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화를 냈다. 알렉산드라 역시 자주 오만하다고 느껴졌던 동서와 또 엮인다는 것 역시 싫어했으며, 또 그녀의 반 독일 감정 역시 혼담에 거부감을 느끼는 주요한 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어머니들의 반대는 조지가 마리와 결혼하지 못하게 했는데, 마리야 공작부인은 딸에게 조지를 거절하라고 압력넣었고, 딸의 마음이 바뀌거나 시어머니의 강압적 태도때문에 상황이 바뀔것을 걱정해서 얼른 딸의 혼처를 찾았다. 결국 1893년 1월 마리는 루마니아의 왕위계승자였던 페르디난드와 결혼했다.


에든버러의 마리, 루마니아의 왕비, 얼마전에 죽은 루마니아의 전 국왕 카롤 2세는 마리의 손자였습니다.


이렇게 마리의 결혼이 결정되면서 빅토리아 여왕은 안그래도 못마땅한 며느리에 대해서 더욱더 못마땅함을 느꼈을 것이다. 여왕은 후손들의 결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여왕에게 이런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왕은 이제 다음차례가 된 더키의 결혼은 꼭 자신의 뜻을 이루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여왕이 점찍은 더키의 남편감은 여왕의 외손자이자 헤센의 대공이었던 에른스트 루드비히였다.


이 혼담에서 당연히 마리야 공작부인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역시나 영국 왕실이랑 또 엮이는 것이 싫었던것이다. 하지만 이 결혼은 조지와 마리의 경우와는 좀 달랐다. 먼저 에든버러 공작과 빅토리아 여왕이 적극적으로 이 혼담을 지지했다.이미 한번의 경험으로 마리야 공작부인이 끼어들 틈을 안 주려했다. 게다가 마리야 공작부인 역시 후에 이 결혼을 지지하게 되는데 헤센의 대공은 외가가 영국이었지만 독일 왕족으로 통치영지가 있는 다름슈타트에서 거주했다. 이것은 그녀의 딸이 영국에 살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또 헤센의 대공의 부모는 이미 다 사망했기에 더이상 영국이랑 직접적으로 엮일 일이 없었고, 또 더키에게 스트레스 줄 시어머니가 없었으며 시누이들 대부분도 시집가서 더키가 다름슈타트에서 자신의 뜻대로 살수 있으리라 여겼다. 결정적으로 마리야 공작부인의 어머니 역시 헤센 대공가문 사람이었기에 헤센 대공가문에 대한 호의도 있었다.(에른스트 루드비히의 대고모가 마리야 공작부인의 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였습니다.)


헤센 대공가문 사람들, 더키와 에르니의 결혼식 다음날인듯, 그러고보니 더키의 시누이인 엘라의 남편인 세르게이는 더키의 외삼촌이군요.--;; 이집안족보도...-0-;;


더키의 부모가 결혼에 대해서 둘다 호의적이 되었지만, 당사자들은 사실 서로에 대해서 그냥 친척으로만 여겼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결정하고 부모가 승락하자 둘은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게 된다. 에르니는 부모가 모두 사망했기에 혼담을 결정할 사람은 실제적 어머니 역할을 했던 누나 헤센의 빅토리아나 심정적인 어머니 역할을 했던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에르니의 누나인 빅토리아나 에르니 본인 역시 외할머니의 뜻을 거스를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키의 경우는 더 복잡했는데 겨우 열일곱살의 소녀티를 벗은 여성에게 부모가 결혼하라고 압력을 넣었기에 결혼을 해야하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게다가 가족내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빅토리아 여왕이 압력을 넣고 있었으며 에르니 마저 이를 수용했기에 거절할만한 이유나 명분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더키는 에르니와 결혼하기로 했다.


1894년 4워 19일 에든버러 공작의 영지인 작센-코부르-고타의 수도인 코부르크에서 헤센의 대공인 에른스트 루드비히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는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에는 수많은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들이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 더키의 어머니가 러시아의 여대공이었기에 외삼촌들과 외숙모 사촌등이 참석했던것도 있지만 사실 이들이 온 이유는 더 중요한 이벤트 때문이었다. 더키가 결혼한 다음날 오래도록 연애관계에 있었던 더키의 사촌이자 시누이였던 헤센의 알릭스가 역시 더키의 사촌이었던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닉키) 대공의 청혼을 수락해서 정식으로 약혼이 발표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러시아 쪽 사람들이 많이 온것으로 봐서 알릭스는 이미 오빠의 결혼전에 청혼을 수락하기로 결정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를 너무나 싫어하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 이를 감췄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왜냐면 결혼 직전에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독일의 프리드리히 황후가 딸인 조피에게 쓴 편지에서 알릭스와 닉키의 결혼이 가망이 없어보인다는 내용이 들어가있는데, 결혼 다음날 약혼이 공표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키와 에르니의 결혼식에 모인 빅토리아 여왕과 후손들 그리고 친척들,예전에 이름표 달았던 사진이 있는데 못찾겠습니다.--;;


더키와 에르니의 결혼은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흡족한 결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이 짝지워준 손자 손녀들에 만족했으며, 공작 역시 딸을 조카와 결혼시켜서 가족간의 연결고리를 돈독히 한것을 좋아했다. 공작부인 역시 이제 시누이들 모두가 시집가서 결국 딸이 헤센 대공비로 하고 싶은대로 살수 있을 것이기에 만족했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 결혼이 흡족하지 않았고 결국 이것은 불행한 결혼생활로 이어지게 된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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