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황제의 손녀, 두 대공의 아내(7)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 일곱번째 불행 그리고...

by 엘아라

이혼후 더키는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더키는 딸인 엘리자베트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어린 아이였던 엘리자베트는 엄마와의 관계가 늘 서먹한 사이였다. 엘리자베트가 좀 더 나이가 든다면 어머니를 어느정도 이해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키와 엘리자베트 사이에는 이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된다.


Princesa_Isabel_de_Hesse%2C_1903.jpg 헤센의 엘리자베트, 1903년


1903년 10월 에르니의 조카이자 엘리자베트의 사촌이었던 바텐베르크의 앨리스가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앨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고 안드레아스 왕자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손자로 두 가문은 유럽 전역에 퍼져서 살았었으며 이들은 이 결혼식을 기회로 다시 만나게 된다. 당연히 앨리스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의 조카였을뿐만 아니라, 안드레아스 왕자는 니콜라이 2세의 사촌이기도 했기에 황제 부부는 딸들과 함께 이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었다. 결혼식이 끝난 몇주뒤 황제 가족과 에르니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함께 황실 사냥터로 휴가를 떠났다. 이곳에서 엘리자베트는 사촌들인 러시아 여대공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곧 상황은 비극으로 치닿게 된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는데 가슴의 통증을 느꼈고 열이 엄청나게 났다. 이 상황은 러시아 궁정 의사들을 긴장시키는 일이었는데 엘리자베트는 사촌들과 함께 지냈기에 전염병이라면 여대공들 역시 안전을 보장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421px-Olga_and_Tatiana_Nikolaevna_with_her_cousin_Elizabeth_of_Hesse.jpg 러시아 사촌들인 올가와 타티아나와 함께 있는 엘리자베트, 1900년


아이의 상태가 나빠지자 사람들은 모든 일을 서두르게 된다. 바르샤바에서 전문의를 데려왔으며 황후에게 아이의 어머니에게 연락해야한다고 건의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더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비록 알렉산드라가 더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써 아이를 잃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의도적으로 더키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아이가 그렇게나 갑자기 손쓸사이 없이 상태가 나빠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황후가 연락을 미루는 동안 엘리자베트의 상태는 더욱더 나빠졌으며 의사들이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1903년 11월 16일 사망한다.


더키는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아이에게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준비를 다 마치기도 전에 더키는 또한통의 전보를 받았다. 엘리자베트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더키는 폴란드가 아니라 딸의 장례식이 치뤄질 다름슈타트로 바로 가기로 했다.에르니는 사랑하는 딸의 마지막을 동화처럼 해주었다. 검은색의 장례식이 아니라 백마가 끄는 수레에 관은 꽃으로 뒤덮혀있었다. 더키는 딸의 관에 자신의 헤센 대공가문 훈장의 메달과 별을 두었다. 더키에게 딸의 죽음은 이전 결혼생활과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은 더키가 이제 더이상 옛 삶을 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Funeral_procession_of_Princess_Elisabeth_of_Hesse_and_by_Rhine.jpg 헤센의 엘리자베트의 장례식 행렬


아마 더키는 딸이 죽은뒤 모든 것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하려 했을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져있었을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는 그녀와 그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 1904년 4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키릴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아마 딸이 죽은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사랑하는 사람의 생사도 모르는 상황을 맞이했기에 더키는 너무나도 끔직한 시간을 보냈어야했다.


315px-Grand_Duke_Kirill_Vladimirovich_Romanov.JPG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키릴은 러일전쟁 지역이었던 포트 아서(뤼순항)으로 가게 된다. 이곳은 당시 일본함대고 항구를 봉쇄중이었고 러시아의 함대는 이 봉쇄를 뚫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키릴은 러시아의 전함이자 당시 함대 사령관의 기함이었던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 참모로 타고 있었다. 함대 사령관이었던 마카로프는 전 함대가 항구 밖으로 기습적으로 나가서 일본의 봉쇄를 풀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 따른 전투를 진행하던중 페트로파브로프스크는 일본군의 기뢰에 맞아 침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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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은 사령관과 함께 브릿지에 있다가 폭발에 휩쓸렸으며 브릿지에 있던 모든 이들이 폭발로 바다로 튕겨져나갔다. 브릿지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유일하게 키릴만이 생존할수 있었다. 그는 얼굴에 화상을 입고 등에는 부상을 입었으며, 폭발과 배의 침몰로 인해서 거의 익사할뻔했지만 간신히 살아남을수 있었다.


313px-Sinking_of_the_Petropavlovsk.jpg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침몰, 일본측 그림


키릴의 생존은 모두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었으며 특히 키릴의 부모와 더키에게는 더욱더 그랬다. 더키를 반대했던 키릴의 어머니는 아들의 생존소식에 너무나도 기뻐했으며 더키에게 직접 그 소식을 알려줄 정도였다. 키릴은 전쟁영웅으로 돌아왔으며 황제는 키릴에게 부상치료를 위해서 러시아를 떠나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이것은 황제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촌에게 더키에게 가도 좋다는 허락을 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키릴은 지체없이 더키에게로 갔으며 그녀 곁에 머무르게 된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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