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 재혼과 추방
키릴 대공은 사랑하는 더키에게 왔으며, 둘은 함께 지내게 된다. 죽음 직전의 경험은 키릴 대공에게 삶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죽을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된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릴이 더키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니콜라이 2세에게 후계자가 태어나면서였다.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라 황후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딸을 뒀었다. 황제는 황후와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딸들에게 매우 좋은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감은 어쩔수 없었다. 그리고 결혼 10년만인 1904년 8월 드디어 기다기고 기다리던 아들 알렉세이를 얻었다. 알렉세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황제의 다음 황위계승자는 동생이자 미혼이었던 미하일 대공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키릴의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대공과 그 아들들이 계승자였다. 이때문에 키릴은 중요한 러시아 황위계승 후보자였으며 결혼 문제가 정치적 문제가 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렉세이가 태어나면서 계승순위는 멀어지게 되는데, 이제 황제의 직계 아들이 태어났기에 키릴의 계승순위는 밀려나게 되었으며 만약 황제에게 아들들이 더 태어나거나(...하지만 불행히도 황후의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그럴일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결혼해서 그 아들들이 태어난다면 키릴의 계승순위는 훨씬 더 밀려나게 될 것이었다. 키릴은 이런 상황에서 이제 자신의 결혼이 황제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으며, 아들을 얻은 짜르가 자신과 더키의 결혼을 인정해줄것이라 여겼다.
1905년 10월 8일 더키는 드디어 사랑하는 키릴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결혼식은 더키의 어머니이자 키릴의 고모였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집에서 치뤄졌는데 러시아쪽 가족들은 마리야 여대공이 가장 좋아한 오빠였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알렉산드르 2세의 넷째아들)만이 초대되었다. 하지만 왜 초대하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기에 알렉세이 대공은 결혼식이 끝난뒤에야 도착했었다.
키릴의 예상과 달리, 키릴과 더키의 결혼에 니콜라이 2세는 매우 화를 내었다. 그는 허락없이 결혼한 사촌들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키릴의 모든 지위와 재산을 뺏고 러시아에서 추방하겠다고 결정을 했다. 황제의 숙부이자 키릴의 아버지였던 블라디미르 대공은 황제의 이런 결정에 매우 화를 냈으며 황제와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게 된다. 니콜라이 2세는 숙부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모습에 당황했으며, 단호하게 그에게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숙부가 떠난뒤 니콜라이 2세는 키릴의 군대 지위만을 뺏고 러시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처분을 완화시켰다.
망명생활동안 키릴과 더키는 친척들을 만나고 여행을 하는 등의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더키에게는 왕족으로 의무를 행해야할 나라가 없었으며 키릴은 추방되었기에 할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1907년 더키는 둘의 첫아이인 마리야 키릴로브나를 낳았다. 그리고 더키는 정교회로 개종했는데 비록 추방당하긴 했지만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러시아 황실 가족들중에서 키릴과 더키를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있었다. 이들은 황제의 진노를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조금씩 키릴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 1908년 키릴의 숙부이자 더키의 외삼촌이었던 알렉세이 대공이 죽었을때 키릴은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물론 더키는 허락받지 못했지만 그가 공식적으로 러시아로 가는 것을 허락받은 계기였기에 러시아 상황이 점차 더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1909년이 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1909년 초 키릴의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대공이 죽어가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대공이 죽게 되면 키릴은 제3황위계승자가 되는데 당시 황위계승자들에게는 문제가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였기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은 신분이 낮은 유부녀와 눈이 맞았고 그녀와 함께 하고 있었기에 후계자가 되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동생인 미하일을 생각하면 키릴은 매우 양호한 경우였다.
1909년 2월 니콜라이 2세는 키릴과 더키의 결혼을 정식으로 인정했고, 더키가 위대한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을 허락했기에 이후 더키는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로 알려지게 된다. 키릴과 더키는 이제 더이상 망명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둘의 결혼을 정식으로 인정받고 러시아의 대공과 대공비로 당당하게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