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발리레 마리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셋째딸인 헬레나 공주는 여왕의 딸들중 얌전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여왕은 어린시절부터 얌전한 성격의 헬레나가 결혼하지 않고 홀로된 자신 옆에서 평생 살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여왕은 딸을 과소평가했다.
얌전한 성격의 헬레나는 온가족을 뒤집어지게 만들면서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녀가 결혼하고 싶어했던 남자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의 아들이었던 아우구스텐부르크의 크리스티안이었다,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의 핵심인물이었다. 덴마크 왕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을덴마크 국왕의 통치 영지로 묶으려 했다. 이것은 공작의 반발을 사는 것이었는데 당시 덴마크 왕가는 남성 직계 후계자가 바닥난 상태였고, 여성 후계자를 통해서 왕위 계승자를 데려오려했다. 이렇게 되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은 살리카법에 따라 덴마크 왕가의 제1분가였던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가문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덴마크 왕가에서는 공작령을 잃지 않기 위해 덴마크 국왕의 영지로 합병하려했고 이것은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의 반발을 사는 것이었다. 결국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은 자신의 권리를 잃지 앟기 위해 이 공작령이 독일에 편입되는 것을 지지하게 된다. 이 상황은 덴마크 입장에서는 배신이나 다름없는것이었고 결국 전쟁까지 일어나게 된다. 뭐 이것이 제 1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의 배경이었다.
헬레나가 결혼하려는 남자는 이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의 아들이었는데 여기에는 덴마크와 독일의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1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은 덴마크가 승리했지만, 헬레나가 결혼하길 원했던 남자의 형이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이 된 인물은 적극적으로 슐레흐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의 상속을 주장한다. 당시 덴마크는 방계 가문 출신이자 여성 후손의 권리를 이어받은 크리스티안 9세가 국왕이 되었는데, 덴마크 왕가의 제1분가로써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 상속을 주장했고, 이에 프로이센이 다시 한번 호응했다. 이렇게 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일어났는데 결과는 1차와는 전혀 달랐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국이 승리를 거뒀으며 덴마크는 영토의 1/3을 잃는 상황에 놓였었다. 당연히 덴마크에서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은 배반자나 다른 없었다.
이 문제가 왜 영국 공주가 결혼하는데 가족들간의 반목으로 변했는가하면,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버티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딸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했다.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였던 알렉산드라는 그 미모때문에 영국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할수 있었다. 이것은 버티가 처자인 덴마크에 호의적이되는 원인이었다. 반면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이자 제일 똑똑했다고 알려진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프로이센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햇다. 이것은 프린세스 로열이 프로이센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햇다. 이런 상황에서 헬레나가 문제의 중심이 된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의 아들이자 동생과 결혼하겠다고 나선것이었다.
당연히 큰오빠부부는 반대했고, 반면 큰언니 부부는 찬성했다. 여왕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도록 하므로써 실질적으로 독일을 도왔었다. 그런데 그녀의 가정사에 까지 이 문제가 개인하자 여왕은 역시나 중립을 외치게 된다. 여왕은 딸이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큰아들부부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왕은 장녀를 더 좋아햇으며 만약 대놓고 이 결혼을 반대할 경우 잘못하면 다시 한번 또 정치적 문제가 될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며느리는 늘 시어머니에게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개입해달라고 청하고 있었는데 만약 결혼 허락을 거부할 경우에는 잘못하면 덴마크를 지지한다고 보일수도 있기 때문이엇다. 이 문제는 여왕에게 골치아픈 상황이었는데 다른 자녀들 역시 편으로 나뉘어서 헬레나의 결혼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거나 그랫다고 한다. 당시 여왕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던 자녀였던 앨리스 공주는 처음에는 친한 오빠 버티의 편을 들었으나 동생인 헬레나가 아우구스텐부르크의 크리스티안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뒤 동생의 행복을 위해 결혼을 찬성했으며 결국 여왕은 헬레나의 고집을 못 꺽을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곁에 서 안 떠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하지만 결혼후 헬레나는 홀로된 어머니보다는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챙겼기에 빅토리아 여왕은 많이 삐졌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사윗감도 영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일단 사윗감이 여왕의 맘에 들정도로 잘생기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었을수 있을 것이다._)
헬레나는 아들 둘과 딸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그녀의 둘째아들인 알베르트는 후에 백부의 뒤를 이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지위를 물려받았다. 비록 이 지위는 영지가 없는 지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헬레나의 자녀들은 모두 공식적으로는 미혼으로 지냈다. 딸이었던 마리 루이즈가 결혼했었지만 결국 결혼은 깨졌고 이후 그녀는 언니와 함께 영국에서 살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흘러....
1930년대가 되었다. 그리고 헬레나의 자녀들중 두 딸이었던 헬레나 빅토리아와 마리 루이즈만이 살아있던 그 시절, 두 공주들은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발레리 마리 슈발브라는 여성이 보낸 편지로 자신을 인지 해줄수 없냐는 편지였다. 헬레나 빅토리아와 마리 루이즈는 오빠인 알베르트가 죽기 직전 둘에게 보낸 편지 한통을 받았다. 거기에는 알베르트가 높은 신분의 이름 모를 어느 여성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며 그 딸이 발레리 마리였다는 이야기였다. 알베르트는 죽기전 같은 편지를 발레리 마리에게도 보냈었다. 알베르트는 1931년 사망했으며 발레리 마리가 고모들에게 인지를 부탁한 편지를 보낸것은 1938년이었다. 그 전까지 발레리 마리는 굳이 자신의 사생아 신분을 밝히 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대로 살았었지만 1938년에는 밝혀야할 이유가 있었다.
발레리 마리는 태어나자 마자 유대인 가정으로 보내졌었다. 그녀 자신은 가톨릭으로 성장했지만 유대인 가족에서 성장한 발레리 마리는 유대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발레리 마리는 1938년쯤 첫번째 남편과 이혼한뒤 두번째 남편이 될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결혼할 생각이 있었지만 유대인 출신이라는 그녀의 신분은 두번째 남편될 사람과의 결혼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두번째 남편이 될 사람은 아렌베르크 공작이었다. 아렌베르크 공작 가문은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독일에서는 통치 군주 가문으로 인정받았던 가문이기도 햇다. 특히 시씨황후의 할머니가 아렌베르크 공작의 상속녀였었기에 이 가문은 나름 중요한 귀족가문중 하나였다. 그런데 1938년 독일에서는 유대인들이 옛 귀족이나 왕족 출신과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존재했었다. 결국 발레리 마리가 아렌베르크 공작과 결혼 하려면 그녀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했고 이때문에 고모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헬레나 빅토리아와 마리 루이즈는 공식적으로 발레리 마리가 자신들의 오빠인 슈렐스비히-홀슈타인 공작과 이름을 밝힐수 없는 신분이 높은 여성의 딸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발레리 마리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발레리 마리의 어머니가 누군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었다. 여러명이 거론 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로 알베르트의 사촌이었던 토리아라는 애칭의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공주이다. 빅토리아 알렉산드라는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의 둘째딸로, 평생 미혼으로 지냈었다. 알렉산드라 왕비는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남편의 애정을 원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원하던 애정을 주지않았고 이때문에 자녀들에 대한 독점욕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알렉산드라는 딸들의 결혼에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둘째딸인 토리아는 어머니에게 붙잡혀 평생 미혼으로 지내게 되었다. 유독 토리아가 엄마에게 붙잡혔던 이유는 무엇인가 추정해보면 아마도 금지된 사촌과의 연애 관게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알렉산드라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었으며 시누이의 남편이 된 크리스티안을 대놓고 싫어했다. 이런 알렉산드라가 딸이 그 크리스티안의 아들과 연애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용납할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사이에 아이가 생길수 잇었던 것은 알베르트가 오래도록 독일에 있었으며 토리아는 가족 모임을 핑계로 덴마크로 자주 갔었기에 중간에 어디서 몰래 만났기 때문이었다.
미혼의 남녀가 아이가 생겼으니 결혼하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라 생각될수 있다. 게다가 둘의 신분 역시 서로에게 걸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토리아의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병적인 반응은 둘을 떼어놓게 된다. 토리아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는 평생 바람 핀것에 대해 아내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내가 원하는것은 그녀에 대한 애정 빼고는 다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결국 토리아는 알베르트와 헤어져야했고 당대 많은 높은 신분의 미혼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멀리 떨어져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The Last princess (늘 참조하는 베아트리스 공주 전기)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네 오늘도 4월 1일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프리메이슨 주제로 할까 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이야기가 없어서 건수를 못잡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발레리 마리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앞쪽 이야기들은 사실이구요, 발레리 마리의 어머니를 추측하는 부분만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발레리 마리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수 없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알베르트가 어머니가 누구인지 말을 안했다고 합니다.
단지 높은 신분의 여성이라고만 언급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발레리 마리의 어머니가 미혼의 왕족일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때문에 가끔 토리아가 엄마가 아니냐는 소리가 있긴 한데 별로 신빙성은 없어보입니다. 왜냐면 알렉산드라 왕비가 절대 딸을 안 떨어뜨려 놨고, 다양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토리아가 애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알렉산드라 왕비의 막내 여동생인 티라 역시 미혼모로 딸을 낳았다고 기록이 남아있거든요. 추적해보면 대충 그리스에서 애를 낳았고, 아이는 덴마크로 입양됐다고...)
그리고 발레리 마리의 어머니가 가톨릭이라고 추정하는데 왜냐면 발레리 마리가 유대인 가족에게 입양되었음에도 가톨릭으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름 덕분에 오스트리아 황실과 연결되는 여성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합니다.(프란츠 요제프의 막내딸 이름이 마리 발레리임)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고 공작 본인도 밝히지 않았기에 발레리 마리의 어머니가 누군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만우절 글을 쓸수 있는 것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