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 러시아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러시아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결혼초는 매우 행복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이가 벌어졌다. 자식들 문제로 부부는 다퉜는데, 이를테면 장남은 어머니가 시부모인 황제 부부에게서 받은 이콘의 보석을 훔치는등의 일을 했고, 막내딸은 러시아 여대공으로써의 지위와 체면이 부족하게 매우 예의없고 폭력적 성향을 보였기에 결국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누나였던 뷔르템베르크 왕비에게 보내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콘스탄틴 니콜아예비치 대공이 어린 발레리나와 자기집 근처에서 살림을 차렸고, 그것이 온세상에 공개되는 바람에 부부사이는 거의 끝난것이나 다름 없었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이런 부모와 형제 자매를 지켜보고 살았었다. 그는 누나인 그리스의 올가 왕비처럼 가족들과 잘 지내고 형과 달리 부모말을 잘 듣는 아들이기도 했었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1884년 26살때 외가쪽으로 친척관계였던 작센-알텐부르크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엘리자베트는 결혼후 정교회식으로 "옐리자베타 마브리키예브나"라는 이름을 받았고 가족들에게는 "마브라"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다. 사실 둘의 결혼은 오래전에 약속된것으로 콘스탄틴 대공이 마브라에게 결혼하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콘스탄틴 대공과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부부로 알려지게 된다. 러시아 대공들 대부분이 정부가 있었지만, 콘스탄틴 대공은 정부가 없었으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매우 잘하는 인물로 알려져있었다. 둘사이에서는 아홉아이들이 태어났고 대공은 이 아이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이런 행복한 결혼생활 덕분에 니콜라이 2세의 황후였던 알렉산드라 황후가 가장 좋아한 친척중 한명으로 알려져있기도 했다.
콘스탄틴 대공은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사망했기에 그는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자녀들은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쌓였고 세아들이 볼셰비키에 의해서 같은날 살해당하기도 했다.
자녀들의 운명이 비극적이었던간에 콘스탄틴 대공의 삶은 가정적이고 행복했다고 알려져있었다.
콘스탄틴 대공은 죽기전 자신의 일기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을 꺼렸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뒤에 공개하도록 했다. 그리고 결국 시간이 지난뒤 그의 일기가 공개되었는데 모두가 경악스러워할만한 사실이 담겨있었다. 그렇게나 아내에게 잘하고 아이들도 많았던 콘스탄틴 대공이 동성연애 성향이 강했으며 심지어는 그 감정에 늘 굴복했다고 일기에 적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틴 대공의 생존당시에 동성연애는 매우 죄악처럼 여겨지던 시기였다. 심지어는 그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조차 꺼렸는데 이를테면, 필립공의 이모이자 스웨덴 왕비가 되는 바텐베르크의 루이즈는 아버지에게 동성연애자라는 말을 들었을때 그것이 무슨의미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특히 남성성을 강조하는 로마노프 가문에서 이런 동성연애는 경악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콘스탄틴 대공은 아마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때문에 자신의 성향을 억눌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오직 일기에서만 솔직히 기록했었는데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남성 연인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으며, 날이 가면갈수록 동성연애에 대한 혐오감이 덜해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콘스탄틴 대공은 오래도록 매우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속에서 남아있었다. 만약 그의 일기가 없었다면 그가 진짜 느꼈던 감정을 알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 이런 겉모습만 보고 그에게 남성 연인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수 있었을까?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