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 테크의 메리
"팻메리"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캠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는 영국의 조지 3세의 손녀이자 캠브리지 공작의 딸로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었다. 그녀는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중요 왕위계승자인것도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뚱뚱해서(!!) 다른 왕족들이 그녀와 결혼할만한 뭔가 특별한 잇점이 없었다. 게다가 영국 왕가가 결혼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다면 메리 아델라이드를 동맹의 상대로 맺어줄려고 했을수도 있지만, 당시 영국은 결혼동맹에 목매는 나라도 아니었다. 결국 메리 아델라이드는 30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못했는데 당대에는 거의 결혼을 포기한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의회와 함께 사촌의 혼처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선택된 인물은 왕족과 결혼하기에는 신분이 낮지만 그렇다고 귀족이랑 결혼하기에는 신분이 너무 높다고 여겨지던 "귀천상혼한 가문"출신의 남자였던 테크 공작 프란츠였다. 테크의 프란츠는 원래 뷔르템베르크 국왕과 친척관계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귀천상혼했고 이때문에 아이들은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방계가문 출신이었지만 왕위게승권은 없는 상태였다.메리 아델라이드보다 3살이 어리고 매우 잘생겼다고 알려진 프란츠는 결국 메리 아델라이드와 결혼했고, 영국에서 살았다.
둘사이에서는 딸 한명과 아들셋이 태어나는데 그중 첫째가 딸인 빅토리아 메리 어거스타 루이즈 올가 폴린 클라우딘 애그니스였다. (이 이름에 얽힌 사연은 앞쪽의 제글인 https://brunch.co.kr/@elara1020/260을 참조해주세요) 보통 가족들에게서는 "메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 이 소녀는 어린시절 부모때문에 힘든 상황을 보내게 된다.
테크 공작 부부는 수입에 비해서 과도한 지출을 했다. 둘은 예술을 사랑하고 미술품수집을 좋아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돈이 많이 드는 취미였다. 또 왕족으로 호화로운 파티나 연회등을 좋아했고 자주 연회를 열었으며 옷이나 음식등도 최고급으로 입고 먹었다. 메리 아델라이드의 수입은 영국 의회가 지급하는 것이었지만 무한정 퍼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테크 공작 부부는 이런 경제 관념이 별로 없었고 호화로운 생활은 그들을 파산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
빚때문에 부부는 영국에 머물지 못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의 친척들 사이를 전전하거나 좀더 생활비가 쌌던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했다. 이시절 메리는 이탈리아에서도 잠시 살았는데 부모를 닮아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그녀가 이탈리아에서 많은 에술품을 보고 더욱더 교양을 쌓았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빚때문에 도망갔던 이탈리아에서 얻은 의도치 않은 유익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메리는 이런 부모를 보면서 확고한 경제 관념을 배우게 되었다.
어느정도 외국에서 생활한뒤 빚을 대충 청산할수 있었던 테크 공작 부부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하지만 부부의 경제관념이 확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공작 부부의 똑똑한 딸인 메리가 부모의 경제적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메리는 어머니의 비공식적 개인 비서로 일하면서 어머니의 여러가지 일을 도왔고 부모의 수입과 지출에 관여했었다.
이런 메리의 경제 관념은 후에 그녀가 영국왕실로 들어갔을때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되었다. 메리는 당시 방만하게 운영되던 영국 왕가의 경제 상황을 매우 합리적으로 개선해갔다고 한다. 이를테면 왕가의 물건을 빌려간뒤 안 돌려주는 경우가 종종있었는데 메리의 경우 이런것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서 철저히 돌려받는 등의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