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 스토크마르 남작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서 읽다보면 한 사람의 이름을 자주 만날수 있다. 그의 이름은 스토크마르 남작(Baron Stockmar)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앨버트공과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 조언자였으며 이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삼촌이자 앨버트 공의 숙부였던 벨기에 레오폴 1세의 조언자였으며 그 이전에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가문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폰 스토크마르는 코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의학을 전공해서 의사였던 인물이었다. 당시 코부르크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령의 중심도시였고, 나름 실력이 있어서였는지 스토크마르는 공작 가문의 궁정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후에 의사라는 직업보다 정치적 조언자로 유명했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처음으로 성공한 정치적 조언은 바로 당시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의 딸과 러시아 대공과의 혼담을 성사시킨것일 것이다.
1795년 러시아의 장군이었던 안드레이 버드베르크 장군은 예카테리나 2세의 밀명을 받고 전유럽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여제가 준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무리한 유럽여행을 했는지 그만 코부르크에서 병이 나버렸으며 이때문에 앓아눕게 되었다. 이에 공작의 궁정 의사였던 스토크마르는 그를 만나서 병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스토크마르는 버드베르크 장군의 진짜 임무를 간파했다. 장군의 진짜 임무는 바로 여제의 둘째 손자이자 러시아의 제 3황위계승자였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의 신붓감을 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에 스토크마르는 장군에게 코부르크에 있는 공작의 딸들은 매우 훌륭하며 충분히 러시아 대공의 아내가 될만하다고 언급을 하게 된다. 장군은 몸이 많이 아팠는지 아니면 스토크마르의 말에 넘어갔는지는 몰라도 여제에게 코부르크에서 대공에게 적당한 신붓감이 있다고 이야기했으며 다른 곳은 가지도 않았다. 결국 여제는 장군의 추천대로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의 딸중 하나를 손자며느리로 선택했다.
이 사건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가문에 매우 중요한 결혼으로 이 결혼이후 가문의 운이 트이게 되었다.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가문은 사실 러시아 황실에 비하면 왕족이라도 시골뜨기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이런 대가문으로 딸이 시집가면서 가문의 위상은 물론 경제적인 이익이나 다른 자녀들의 혼담 역시 잘 풀리게 된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와의 연결고리 덕분에 나폴레옹의 점령을 피할수 있기까지 했었다. (물론 이 결혼으로 부부가된 둘이 행복했는가는 별개 문제였다.)
이후 스토크마르는 웨일즈의 샬럿과 결혼하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의 의사로 영국으로 갔었다. 그후 레오폴트가 벨기에의 국왕이 되면서 스토크마르는 벨기에 국왕의 조언자로 남았다. 그는 여기서도 몇몇 사항을 조정했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도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사이에 대한 것일것이다. 특히 그는 앨버트를 영국의 왕위계승자인 빅토리아의 남편감으로 주장한 사람들중 한명이었다. 이것은 결혼으로 이익을 추구했던 작센-코부르크-잘펠트(후에 고타)에 가장 큰 이익이 될 것이었다. 또 그는 켄트 공작부인이 존 콘로이의 꼭두각시가 될것을 우려했고 벨기에의 레오폴 1세와 함께 빅토리아가 스스로 통치할수 있게끔 기반을 마련해주는데 조언을 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앨버트가 빅토리아와 결혼한뒤 영국 왕실의 조언자로 남았었다.
스토크마르의 조언은 후에도 꽤나 유용했는데 이를테면 빅토리아 여왕 부부가 자녀들에 대한 과도한 교육열로 장남이자 후계자인 버티의 교육계획을 짰을때 남작은 여왕 부부에게 그렇게 하면 애를 잡을것이라고 충고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실제로 여왕 부부는 장남을 들들 볶아대서 도리어 자신감 상실에 맞닥들이게 되었고 후에 에드워드 7세가 되는 버티는 자신의 어린시절 악몽을 떠올리면서 자녀들은 그냥 풀어놓고 키웠다고 한다. 물론 빅토리아 여왕은 그걸 두고보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