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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24. 2018

난 내딸한테 양위한것이거든!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 &4세

포르투갈의 역사에서 가장 복잡한 상황중 하나는 바로 왕가가 브라질로 이주한 뒤의 상황일 것이다.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위협하자 포르투갈 왕가는 유럽대륙을 떠나서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난 식민지 브라질로 이주해버렸다. 이것은 나폴레옹에게 왕가 전체가 인질로 잡혀 있었던 에스파냐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현명한 선택일수도 있지만 후에 포르투갈-브라질의 정치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브라질로 떠나는 포르투갈 왕가


포르투갈에서 나폴레옹과 포르투갈&영국 연합군이 전쟁을 하는 동안, 포르투갈의 왕가 및 핵심 인력과 기관들 모두가 브라질로 갔으며 이것은 브라질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브라질은 식민지에서 포르투갈과 동격의 지위로 올라가기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뒤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뒤 본국인 포르투갈에서는 왕가와 주요 기관들이 다시 본국인 포르투갈로 돌아오길 바랬다.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왕가가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간 뒤 브라질이 이전의 식민지 상태로 다시 돌아갈것을 우려했다. 결국 국왕 주앙 6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동 페드루는 브라질을 떠나지 않고 브라질에 남았으며 브라질인들의 열망을 받아들여서 포르투갈에서 독립을 한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브라질 제국의 선포


또 포르투갈 내에서의 상황은 복잡했는데 포르투갈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이후 유럽의 여러나라들처럼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갈등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주앙 6세의 막내아들인 미겔이 아버지에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반란은 실패했고 미겔은 망명을 해야했다.


주앙 6세와 포르투갈의 대다수 사람들은 브라질의 황제가 된 페드루 1세가 정당한 왕위계승자로 생각했다. 하지만 주앙 6세가 죽을 무렵 페드루는 물론 미겔도 포르투갈에 없었기에 포르투갈의 왕위는 애매한 상황에 이르렀고 주앙 6세는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돌아올때까지 딸인 이사벨 마리아가 섭정을 맡도록했다.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4세


하지만 정치 상황은 더 복잡해지는데, 브라질에서 만약 페드루 1세가 포르투갈의 국왕이 될 경우 브라질이 다시 이전의 식민지 상황으로 돌아갈것을 우려했기에 페드루가 포르투갈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아다. 게다가 페드루의 동생인 미겔은 유럽 대륙에 있었기에 형보다 더 빨리 포르투갈로 돌아갈수 있었으며 지지자도 더 많이 얻을수 있었다. 결국 이런 상황은 페드루 1세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자신의 장녀인 마리아 다 글로리아에게 양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동생인 미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리아가 성년이 되면 동생인 미겔과 결혼시켜서 둘이 공동으로 포르투갈을 통치하도록 했으며 미성년자인 마리아가 성년이 될때까지 미겔이 섭정으로 있도록 했다.


이 상황은 좋은 해결책처럼 여겨졌지만 정치적 상황은 순탄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마리아 2세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자와 미겔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자로 나뉘었으며, 미성년자인 마리아보다 섭정인 미겔이 당장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당한 군주는 마리아 2세였기에 미겔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조카를 몰아내고 스스로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다.


포르투갈의 미겔, 주앙 6세의 아들이자 페드루 4세의 동생


미성년자였던 마리아 2세는 이미 숙부가 섭정으로 있는 동안 유럽의 여러곳을 다니고 있었다. 이후 포르투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브라질에서 궁정조신으로 일을 했었으며 이제 마리아 2세의 신하로 일하고 있던 바르바세나 후작은 마리아 2세의 외가인 오스트리아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려했었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메테르니히가 미겔을 지지했었기에 전통적 동맹이었던 영국으로 향하게 된다. 영국 역시 애매한 입장이었는데 비록 마리아 2세를 정통 군주로 여겼지만 웰링턴 공작 같은 유력한 인물들이 공공연히 미겔을 지지했었기에 마리아의 입장은 더욱더 난처해지게 된다.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결국 포르투갈 내에서 마리아 2세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입지가 약해졌으며 포르투갈은 미겔의 손에 장악되게 된다. 포르투갈내 자유주의자들은 포르투갈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아소르스 제도 내의 섬인 테르세이라 섬에 겨우 망명정부를 만들게 되었다. 


마리아 2세는 영국에서 냉대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있는 브라질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미성년이었던 여왕에게 매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기도 했다. 마리아 2세가 브라질로 돌아가면서 포르투갈은 완전히 미겔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듯보여다.


하지만 1831년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포르투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31년 마리아 2세의 아버지인 황제 페드루 1세는 브라질의 제위를 여섯살난 아들 페드루 2세에게 양위하고 가족과 함께 브라질을 떠나게 된다. 여기에는 당연히 마리아 2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브라질의 페드루 1세의 양위


브라질에서 떠난 페드루 1세는 이제 포르투갈 내의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이 딸인 마리아에게 양위한것이지 동생인 미겔에게 양위한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포르투갈의 국왕이며 자신은 "브라간사 공작"칭호와 마리아 2세의 섭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제 포르투갈 왕위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페드루는 유일한 마리아 2세의 지지자들이 있던 아소르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으로 갔으며 여기서 스스로 딸의 왕위를 되찾기 위한 병력에 가담했고 전투에 참전했다. 


아마 정치적 상황에서 페드루의 참전은 매우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마리아 2세는 어린 소녀일뿐이었기에 지지자들과 명분을 모으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페드루 1세&4세는 주앙 6세가 인정한 정식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였으며 성인으로 전투에 직접 참전할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훨씬더 세력을 모을수 있었을 것이다. 


페드루와 미겔의 싸움과 유럽 세력과의 관계를 묘사한 캐리커쳐


그리고 아소르스 제도를 떠나 포르투갈 본토로 들어간 2년후인 1834년 페드루는 동생인 미겔을 물리치고 딸의 왕위를 다시 되찾게 된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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