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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Dec 10. 2018

왜 내딸에게 왕위를 못 물려주냐고!

가벼운 역사이야기 :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의 후계자 문제

카스티야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오래된 왕국중 하나였다. 이베리아 왕국의 왕가들은 혈연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가까웠으며 이런 상황은 이베리아 반도내의 왕국들간의 왕위계승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 각각의 왕국들이 다른 나라의 왕위계승에 연관되기도 하고 아니면 반대로 내정을 간섭하기도 하고 또는 결혼을 통한 왕위를 주장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왕국 내 귀족들의 세력을 강하게 만들었고 또 자주 내전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어쨌든 15세기 카스티야에는 엔리케라는 이름의 국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카스티야와 레온의 엔리케 4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부왕인 후안 2세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고 숙부들과 사촌들에게 휘둘렸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귀족세력도 강성해졌기에 복잡한 상황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슬람 세력과도 가끔씩 전투를 했기에 엔리케 4세도 안팎으로 복잡한 상황의 나라를 물려받게 된다.


카스티야와 레온의 엔리케 4세, 별명이.......흠흠흠


엔리케 4세는 결혼문제때문에 복잡한 정치 상황을 맞게 된다. 그는 원래 사촌인 나바라의 블란카와 결혼했지만 카스티야에서 세력을 행사하던 후안 2세의 사촌들이자 자신의 외삼촌들이기도 했던 "아라곤의 인판테들"과 연관된 아내를 그다지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듯합니다. 그리고 결혼 13년만에 결혼을 깨는데, 결혼을 무효화한 이유에 대해서 모두들 함구 했지만, 블란카의 공식제의로 확인된바에 의하면 "결혼의 미완성"이었다. 의사는 결혼 13년이 지났음에도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엔리케 4세는 정부도 없었는데 정부도 없었는데도 아내와 13년간 잠자리도 안했다는 것은 당연히 엔리케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물론 교황청에서 내린 결혼 무효 이유는 다른것이었는데 카스티야는 이슬람 세력과 맞서는 최전선의 기독교 왕가였고 이런 왕가에 대해서 교황청에서는 나름 많이 너그러웠다.


엔리케 4세는 블란카와의 결혼무효를 받아낸뒤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위해서 포르투갈의 공주였던 후아나와 재혼을 했다. 하지만 카스티야 내부에서는 어짜피 국왕이 결혼하든 말든 후계자는 태어나지 않을것이기에 엔리케의 후계자가 될 다른 인물에 집중하고 있었다. 바로 엔리케의 이복동생인 알폰소였다.


그런데 자녀가 없을것 같았던 엔리케 4세에게 두번째 결혼한지 6년쯤 지난뒤에 뜬금없이 딸이 태어난것이었다. 사실 왕가에는 이런 경우가 가끔씩 있는데 그것은 왕과 왕비가 정략결혼으로 서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가 후계자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해서 함께하는 경우가 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녀가 태어나면 이렇게 뜬금없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엔리케 4세는 이미 이전 결혼에서 아내와 13년간이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었고 아마 그가 그럴 능력이 없다고 모두들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두번째 아내가 결혼 육년만에 아이를 낳자 모두들 그 아이의 출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후아나, 엔리케 4세의 두번째  왕비


엔리케 4세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을 의심하고 그의 후계자의 혈통을 의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자연스러운 의심이기도 했다. 곧 궁정에서는 새로 태어난 인판타가 국왕의 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후아나 왕비가 국왕의 총신이었던 벨트란 드 라 쿠에바와 바람펴서 낳은 아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카스티야를 두개로 나눴는데 엔리케를 지지하던 쪽인 멘도사 가문(벨트란 드 라 쿠에바의 아내가 이 멘도사 가문 출신이었다.)은 새로태어난 인판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후안 파체코와 톨레도 대주교쪽은 국왕의 동생인 알폰소를 지지하게 된다. 이것은 사실 후안 파체코와 그 주변 인물들 vs 벨트란 드 라 쿠에바와 그 주변 인물들(멘도사 가문)정도로 해석할수도 있을 것이었다.


엔리케 4세는 새로태어난 딸인 후아나를 자신의 친자식이라 주장하고 왕위계승자에게 부여하는 지위인 "아스투리아스 여공"의 지위를 부여했었다. 하지만 후안 파체코와 그의 동조세력들은 이를 거부하고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알폰소를 지지했으며 결국 왕위계승 문제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 내전은 결국 알폰소를 지지하는 후안 파체코쪽의 승리로 돌아갔고 그 결과 알폰소는 엔리케 4세의 후계자로 선포된다. 대신 엔리케 4세는 자신의 딸인 후아나를 동생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문제가 해결되는 듯했지만....1468년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알폰소가 사망하면서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알폰소가 죽자 엔리케 4세는 다시 딸이 자신의 왕위계승자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후안 파체코는 엔리케 4세의 이복 동생이자 알폰소의 누나였던 이사벨을 정당한 왕위계승자로 주장하게 된다. 사실 알폰소 와 후아나 사이를 선택해야했을때 당연히 남성이었던 알폰소를 지지하는 측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이사벨과 후아나였고 두 여성왕위계승자중 누구를 지지하는 가는 진짜 미묘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다시 한번 후아나의 출생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엔리케 4세는 내전 이후 아내인 후아나 왕비를 궁정에서 추방했었는데 1468년 후아나 왕비가 쌍둥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이것은 엔리케 4세와 그의 딸인 인판타 후아나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다. 이런 불륜은 인판타 후아나가 국왕의 딸이 아니라는 의심을 확정으로 만들었고 엔리케 4세는 결국 자신의 딸인 후아나가 있었음에도 딸을 왕위계승에서 배제해야했고 대신 동생인 이사벨을 아스투리아스 여공으로 세우면서 왕위계승자로 만들어야했다.

엔리케 4세의 이복 여동생, 카스티야의 이사벨, 유명한 그분!!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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