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이야기 : 니콜라이 1세의 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의 결혼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매우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고 가부장적인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여성들이 집안에서 아이를 잘 키우고 집안을 관리하는 것에 전념해야한다고 여겼으며 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매우 똑똑하고 정치적 식견도 있었다고 알려져있지만 남편의 뜻에 따라 아이들 교육에만 힘썼다고 한다.
니콜라이 1세는 당대 많은 왕가의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첫째는 바로 그의 후계자가 될 아들이었다. 아내인 알렉산드라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때 니콜라이 1세는 당연히 둘째도 아들을 바랬다고 한다. 아들 하나로는 아무래도 부족할수 있었기 때문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는 니콜라이 1세의 바람과는 달리 딸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가 태어났고, 니콜라이 1세는 대놓고 실망스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났을때의 실망감은 아이가 자라면서 눈녹듯이 사라졌다. 자신과 외모와 심지어 성격마저 닮았던 딸 마리야를 보고 니콜라이 1세는 이 딸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일명 "딸바보 아빠"가 되어버린다.
이후에 니콜라이 1세에게는 세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이 더 태어났지만 니콜라이 1세가 가장 사랑한 자녀는 이 마리야 여대공이었다.
마리야 여대공은 지적이었으며 아버지처럼 매우 고집이 셌었다. 아마도 그녀는 일단 아버지를 닮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가장 예뻐하는 자식이었기에 이런 그녀의 고집을 주변에서 더 꺽을수 없었기에 더 자기 마음대로 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딸의 남편감을 걱정하기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마리야 스스로 남편감을 찾으면서 해결된다.
1837년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1세는 자신의 조카를 러시아로 보내게 된다. 그리고 마리야는 그와 사랑에 빠져버린것이었다. 마리야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러시아 황실을 발칵 뒤집어지게 된다.
마리야가 사랑에 빠진 루드비히 1세의 조카는 바로 로이히텐베르크의 막시밀리안으로 그의 어머니인 아우구스테가 바이에른의 공주로 루드비히 1세의 여동생이었다. 이런 가족관계는 바이에른 왕가의 화려한 결혼관계 덕분에 유럽의 상당수 왕가와 친인척관계를 만들고 있어고 이것은 러시아 황실과 통혼하는데 유리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아버지가 바로 외젠 드 보아르네였다는 것이었다.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아들로 나폴레옹의 양자로 평생 그에게 충성했다고 알려진 외젠 드 보아르네는 정략결혼으로 바이에른 공주와 결혼했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외젠의 아내는 남편을 떠나지 않았고 외젠은 결국 처가인 바이에른 왕국으로 가서 살았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유럽을 구해줬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런 러시아 황제의 딸이 나폴레옹의 양손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로이히텐베르크 가문은 일명 "벼락부자"가문으로 유럽의 왕가들이 무시하던 사문중 하나였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러시아 황실의 극렬한 반대를 만들었다. 더 재미난 것은 막시밀리안의 어머니인 아우구스테 공주 역시 이 결혼을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여대공과 결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겼다고 한다.(종교적 차이는 믿음의 문제라서 큰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아마 막시밀리안쪽은 금방 설득할수 있었겠지만 마리야쪽은 매우 심각했다. 황제와 황후는 딸을 설득하려했지만 어릴때부터 매우 고집스러웠으며 늘 자기 마음대로 했던 마리야 여대공은 절대 자신의 뜻을 꺽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황제와 황제를 닮은 고집스러운 딸이 싸움을 했고 아무리 고집이 세더라도 자식이기는 부모없다는 속담처럼 마리야 여대공의 승리로 끝난다.
가장 사랑하는 딸의 소원때문에 딸의 결혼을 허락했지만, 니콜라이 1세는 딸이 바이에른으로 가서 무시당하고 살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고 결국 사위에게 러시아에서 사는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그리고 마리야와 막시밀리안은 183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