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이야기 : 마리 드 부르고뉴와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중요한 결혼이 몇가지가 있었다. 중세시대의 결혼은 우리나라에서 잘 안알려진 지역들을 병합해가는 과정이기에 그렇게 알려져있지 않다. 하지만 합스부르크가문이 유럽 최고의 가문으로 굳히기를 들어갈수 있었던 결혼들의 시작은 바로 마리 드 부르고뉴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일 것이다.
마리 드 부르고뉴는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샤를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마리 드 부르고뉴의 집안은 프랑스 왕가인 발루아 가문의 분가로 프랑스의 국왕 장 2세Jean le Bon의 막내아들인 필리프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되면서 시작된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샤를 6세 당시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대립하던 가문이기도 했다.
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 왕가의 방계 왕가였지만 복잡한 정치적 문제때문에 샤를 7세이후 프랑스 왕가에 거의 등을 돌린 상황이었으며, 마리의 아버지인 샤를은 부르고뉴 지방을 프랑스에서 독립된 군주 국가로 만들기 위해 힘을쓰고 있었다.
사실 부르고뉴 공작령은 현재의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지방과 프랑스 일부를 포함하는 지방이었는데 이곳은 중세시대부터 오래도록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가 맞아떨어졌기에 샤를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원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복잡한 상속 문제를 거쳐서 그의 공작령은 유일한 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상속받게 된다.
마리 드 부르고뉴가 공작령을 상속받자,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루이 11세는 마리보다 13살이나 어린 자신의 아들과 마리를 결혼시켜서 부르고뉴 공작령을 다시 프랑스에 묶으려 했다. 마리 드 부르고뉴는 이에 반발하지만 프랑스 국왕의 압박은 심해지게 된다. 유럽 최고의 상속녀였던 마리 드 부르고뉴를 원하는 왕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프랑스와의 적대적 상황을 각오해야하는 면도 있었다.
마리 드 부르고뉴의 새어머니이자 잉글랜드의 공주였던 요크의 마거릿은 마리에게 아버지의 동맹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합하라고 충고했다. 신랑 후보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이었던 막시밀리안이었다. 그와 마리는 친척관계이기도 했는데 마리의 할머니가 포르투갈의 공주였고 막시밀리안의 어머니 역시 포르투갈의 공주로 마리의 할머니는 막시밀리안의 어머니의 고모이기도 했다.
결국 마리 드 부르고뉴는 막시밀리안과의 결혼을 승락했고 막시밀리안과 마리 드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만나게 된다. 정략결혼이었기에 둘은 만나자마자 바로 결혼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생전 처음 만났으며 심지어 언어도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둘은 서로 매우 어색하게 만남을 가졌는데, 둘다 긴장으로 인해서 마치 시체같았다고 한다. 이에 마리의 새어머니였던 요크의 마거릿은 어색한 두 남녀의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서 궁정 놀이를 해서 둘의 관계를 좀더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막시밀리안과 마리 드 부르고뉴는 이렇게 결혼했지만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둘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면서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려했고 곧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둘은 매우 행복하게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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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행복은 매우 짧게 끝나게 된다. 마리 드 부르고뉴는 셋째아이를 임신하고 있을때 왜가리 사냥을 갔다가 낙마해서 아이를 사산한뒤 사망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막시밀리안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으며 "중세의 기사"처럼 자신의 귀부인(아내인 마리 드 부르고뉴)를 찬양하는 시를 쓰고 아내를 기리는 초상화들을 그리게 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둘의 이야기가 아름다울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부부사이의 열정이 식고 서로에 대해서 권태기가 되기전에 마리가 죽어버렸고 이에 막시밀리안의 기억속에서 마리가 매우 아름답게만 기억되고 있어서였을수도 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