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Dec 31. 2018

정략 결혼이라도 행복할수 있어!!(2)

가벼운역사이야기 : 포르투갈의 페드루5세와 호엔로엔-지그마링겐의 스테파니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는 복잡한 왕위계승 과정을 거처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뒤 왕위는 그녀의 장남인 페드루 5세가 이어받게 된다. 어머니가 죽었을때 만 16살이었던 페두르는 아버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페르디난트의 도움으로 나폴레옹 전쟁과 이어진 내전으로 파탄났던 나라를 회복시키는 일을 계속 진행했었고 나름 성과를 내기도 했었다.


동생과 함께 있는 페드루 5세, 1854년


페드루 5세 역시 어머니처럼 결혼해서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국왕이었기에 포르투갈에 이익이 되는 신붓감을 찾으려했다. 페드루 5세와 포르투갈이 원하던 신붓감은 바로 빅토리아 여왕 부부의 딸들중 한명이었다. 페드루 5세의 아버지인 페르디난트와 빅토리아 여왕 부부는 모두 사촌간이었다. 페르디난트의 아버지가 앨버트 공의 숙부였고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는 페르디난트와 앨버트의 고모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영국같은 강력한 나라와 통혼 관계를 맺는 것은 포르투갈에 매우 이익이 될 것이었으며, 또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영국과 동맹관계이기도 했었다. 결국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을 매개로 하는 한 집안이면서 강력한 나라인 영국과의 통혼을 바란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딸들을 포르투갈로 시집보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종교 문제였는데 당시 영국은 법률로 가톨릭 교도와 결혼하는 사람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도록 되어있었다. 이때문에 딸들의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여왕이 이 혼담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정치적 문제가 되는 것 역시 고려했을 것이었다. 당시 영국 -특히 잉글랜드는 반 가톨릭 감정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만약 여왕의 딸이 가톨릭 교도와 결혼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될수도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여왕의 외손녀인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가 에스파냐 국왕과 결혼하면서 개종하면서 이에 대한 영국내 여론이 매우 안 좋아지게 된적도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페드루 5세의 당숙부와당숙모겸당고모(아 복잡한 족보관계) 1854년


하지만 여왕과 앨버트 공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페드루 5세에게 다른 신붓감을 제안한다. 바로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스테파니였다. 하지만 처음에 페드루 5세와 포르투갈쪽 반응은 스테파니에게 부정적이었다. 일단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은 비록 호엔촐레른 가문(프로이센 왕가)의 분가이긴 했지만 아주 오래전에 분가한 가문으로 한미한 가문이기도 했다. 또 스테파니의 외할머니는 바로 바덴의 대공비였던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였다. 이름에서 알수 있다시피 그녀는 보아르네 가문 출신으로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첫번째 남편이었던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의 오촌 조카쯤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조제핀이 후견인을 맡고 있었는데 유럽 경영의 목표를 위해서 여러 왕가와 통혼했던 나폴레옹이 가문의 여성이 부족했기에 스테파니에게 "프랑스 공주"칭호를 부여하고서는 바덴 대공가문의 후계자와 결혼시켰던 것이다. 또 스테파니의 할머니는 마리 앙투아네트 뮈라였다. 바로 나폴레옹의 매제였던 뮈라 장군의 조카였던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포르투갈에서 당연히 나폴레옹과 연결된 사람의 후손을 받아들이는데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스테파니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다른 이유를 들어 설득을 했다. 먼저 스테파니는 가톨릭 교도였다. 당대 종교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기에 같은 종교를 믿는 신부를 얻는 것은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비록 스테파니가 뮈라나 보아르네 가문과 연결되긴 했지만 바덴 가문이나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가문을 통해서 여전히 유럽의 여러 왕가와 친척관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페드루5세의 할아버지였던 페드루 4세 역시 외젠 드 보아르네의 딸과 결혼했었고 페드루 5세 어머니의 첫번째 남편 역시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들이었던 것도 역시 고려 대상이었을 것이다.


결국 여왕 부부의 중매가 맞아 떨어져서 스테파니와 페드루 5세는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하기전 영국에 간 스테파니를 본 여왕은 딸에게 스테파니에 대해서 매우 칭찬을 했는데 외모에 민감한 빅토리아 여왕이 칭찬한다면 나름 괜찮은 외모였다고 할수 있었을 것이다.


페드루 5세와 에스테파니아 왕비


포르투갈에서 에스테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린 스테파니와 페드루 5세는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에스테파니아는 매우 다정하고 자비심 많은 인물로 이미 결혼전 뒤셀도르프에서 지낼때부터 이미 사람들이 기억할정도로 다른 이들을 돕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런 성품이었기에 페드루 5세와도 잘 지낼수 있었던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에스테파니아 왕비


더하기

행복한 부부의 삶은 얼마 되지 않아서 끝나게 된다. 에스테파니아는 결혼 일년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페드루 5세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과할정도로 일에 매달렸고 시간이 날때마다 아내를 생각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는 역시 재혼 말이 나왔지만 죽은 아내를 생각하면서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2년뒤인 1861년  페드루 5세는 콜레라로 사망했다.


포르투갈의 페드루 5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매거진의 이전글 정략결혼이라도 행복할수 있어!(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