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 바이에른의 이자보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죄없는 사람 돌을 던지라!라고 한 구절이 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역사가들이 역사적 인물들에게 비평이라는 돌을 던져도 된다고 생각은 한다.
그리고 여기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수세기동안 역사가들과 역사를 좀 배운 사람들에게 짱돌을 맞으면서 지내왔던 인물이었다.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얼마나 짱돌을 맞았으면 "이자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알려지게 될 정도였다. 엘리자베트의 프랑스 식 이름이 이자벨이긴하지만 그녀는 이자벨의 애칭인 이자보로 알려져있다. 왕비 같은 고귀한 지위의 여성을 저런 식으로 부른다는 것은 신분제가 엄격했던 중세-근대 유럽 사회에서 그녀가 얼마나 나쁜 평가를 받아왔는가를 알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정치가로 왕비로 그녀 역시 실수를 했으며 돌을 몇개쯤은 맞을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몽땅 다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잘못된것이 아닐까한다.
이자보가 프랑스의 국왕 샤를 6세와 결혼했던 시기 프랑스는 국왕의 숙부들과 외삼촌이었던 네명의 공작들(베리공작,앙주공작,부르고뉴공작,부르봉공작)이 섭정으로 정치를 하던 시기였다. 샤를 6세가 즉위했을때 미성년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도 미리 죽었기에 이렇게 친척 어르신들이 섭정을 한것이었다. 그중 주도적으로 정치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부르고뉴 공작이었다. 이들 섭정은 권력을 오래 갖기 위해서 샤를 6세의 성년을 미루기까지 했다. 어쨌든 샤를 6세는 성인이 되었고 숙부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해서 친정을 할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정당성도 부여받았다.그래서 샤를 6세와 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vs 부르고뉴 공작을 중심으로 하는 국왕의 숙부들의 대립이 있었다.
이자보는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로 왕비가 되었지만 왕권을 강화하려는 남편의 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세에는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약했기에 왕비라고 하더라도 남편이 있는한은 그녀들은 남편에게 의존해야했었고 뭐 그녀가 남편을 반대할 심리적 제도적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프랑스 상황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비록 내정에서는 국왕 vs 숙부들로 나뉘었지만 밀라노 공작인 지안 갈레아초에 대한 입장은 또 달랐다.
지안 갈레아초의 첫번째 부인은 샤를 6세의 고모이자 세공작들의 여동생이었다. 이때문에 프랑스 왕가는 지안 갈레아초에 호의적이었다. 특히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은 지안 갈레아초의 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결혼하기 까지 했었다.
반면 이자보의 경우 반 지안 갈레아초 진영에 있었다. 지안 갈레아초의 두번째 부인은 이자보의 이모있 카나리나 비스콘티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안 갈레아초는 숙부이자 장인이며 이자보의 외할아버지였던 베르나보 비스콘티와 그의 아들들을 밀라노에서 끌어내렸으며 상속 영지를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이런 상황은 이자보가 지안 갈레아초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반 지안 갈레아초 편에 든 또 한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르마냑 백작이었다.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아들중 한명은 아르마냑 백작의 딸과 결혼했고 이런 연결고리로 아르마냑 백작역시 지안 갈레아초의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100년전쟁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르마냑백작,오를레앙공작,부르고뉴 공작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충분히 들어봤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지금부터 보면 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들은 늘 같은 편이 아니라 이해에 따라서 서로 다른 편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사실 국왕이 샤를 6세가 해결할수 있는 문제였다. 그는 아버지같은 인물이 될 가능성이 보였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제 국왕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보일려던 때 그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정상적일때도 있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리고 주변 사람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측근을 적으로 여겨서 공격해서 살해하기도 하는등의 일을 했다. 이런 상황은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국왕 본인 역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샤를 6세는 그나마 정신이 온전할때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길 바랬으며 몇몇 장치를 하게 된다. 그는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에게 섭정의 권한을 부여햇다. 그리고 아내와 처남 그리고 자신의 이전 섭정들이었던 숙부들에게는 후계자의 후견인이 되도록 했다. 하지만 상태가 안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동생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려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숙부가 정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눈감아줬다.
이 상황은 결국 이전 섭정이었던 부르고뉴 공작과 현재 섭정이 될 오를레앙 공작 간의 권력다툼으로 확대된다.
둘은 사사건건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했다. 부르고뉴 공작이 로마의 교황에게도 호의적이었던 반면 오를레앙 공작은 아비뇽의 교황을 대놓고 지지했다. 잉글랜드와의 경제적 문제 때문에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와의 평화를 원했던 반면 오를레앙 공작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다시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문제 하나하나에 서로 반대편에 서서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읜 긴장감은 점점 심해지게 된다.
여기서 왕비인 이자보가 무슨 일을 해야했을까?
사실 이자보의 입장에서는 둘이 싸우다가 다 없어지는 편이 제일 좋았을 것이다. 그래야 어부지리를 할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둘은 너무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결국 그녀는 이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당대 정치적 관념에서 여성은 쌈질만 해대는 남성보다 좀더 온화하고 부드러웠기에 둘을 중재할수 있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여겨졌었다. 그리고 이자보 역시 이 역할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쨌든 둘이 싸워도 프랑스의 왕위는 그녀의 아들이 물려받을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중재자 역할은 이자보의 정치적 영향력을 점차 증대시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반면에 그녀의 정치적인 결정을 위한 운신의 폭이 점차 좁아지는 것이기도 했다. 중재라는 것이 양쪽이 다 마음에 드는 방안은 없으며 결국 한발자국씩 물러나야하는데 만약 양쪽다 물러나지 않으려한다면 결국 불만은 중재자에게 쏟아질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료출처
Adams, Tracy. (2010). The Life and Afterlife of Isabeau of Bavaria.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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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