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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04. 2019

이 여인에게 돌 좀 덜 던져!!(2)

가벼운 역사이야기 : 바이에른의 이자보

부르고뉴 공작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영지문제에 있었다. 그는 브라반트 공작령까지 주장하면서 엄청나게 큰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돈을 얻어낼수 있는 것은 바로 세금문제였다. 그는 세금 문제에 계속 관여하려했었다. 그리고 역시나 돈이 중요한 것을 인식했던 오를레앙 공작 역시 이 권리를 자신이 독점하고 싶어했다. 오를레앙 공작은 기습적으로 숙부의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넣는데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기사들을 이끌고 파리로 왔으며 이자보는 이 문제를 중재하기도 했었다.


이런 날카로운 대립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2세가 사망하면서 해결되는듯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장 2세의 아들이자 형인 필리프 5세에게서 권한을 부여받은 섭정이었다. 그리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역시 필리프 5세의 아들로 형인 샤를 6세에게서 권한을 부여받은 섭정이었다. 이 둘은 대등한 지위로 여겨졌었고 이때문에 치열한 대립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했었다. 하지만 새 부르고뉴 공작이 필리프 2세의 아들인 장은 지위가 달랐다. 그는 섭정이 아니었으며 또한 국왕의 사촌일뿐이었다. 그러나 "겁없는 장"정도로 해석될수 있는 장 상 푀르라고 불리는 부르고뉴 공작 장은 이대로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기 원했으며 이를 위해 서슴치 않고 아버지처럼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가게 된다. 아마 이자보는 시숙부가 죽은뒤 시동생이 권력을 이어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듯하다. 이후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그녀는 여전히 중재자의 역할을 하긴 했지만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좀더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런 상황은 부르고뉴 공작 파들이 그녀에 대한 비방을 기록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그녀와 오를레앙 공작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둘의 불륜소문을 마구 퍼트렸으며 이를 기록으로 떡하니 남겨놓기까지 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오래도록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으며 여러 역사저작가들이 이를 인용하므로써 20세기까지 내내 그녀의 불륜 이야기의 한 주축을 이루게 만들었다.


부르고뉴 공작 장 상 푀르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갈등은 점차 더 커졌으며 누구도 수습할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장 상 푀르는 1407년 11월 26일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길거리에서 살해했다. 물론 사람을 시켜서 저지른 일로 그는 이 일이 일어났을때 처음에는 부인했지만 곧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를레앙 공작의 살해를 인정한다. 이 일은 이자보에게 타격이 되는 일이기도 했는데 이자보가 오를레앙 공작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장 상 푀르는 이자보와 오를레앙 공작의 불륜까지도 주장하게 된다. 물론 이자보는 손 놓고 당하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서둘러 사위인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에게 파리를 호위하라고 명을 내렸고 국왕의 숙부인 베리 공작 역시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서 섭정으로써의 권한을 발동하게 된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암살


이 사건은 결국 적당히 무마하는 선에서 봉합되는데 이제 권력을 손에 넣은 부르고뉴 공작 장 상푀르는 견제 세력이 별로 없었으며 이자보는 그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했었다.그리고 딸인 미셸을 부르고뉴 공작의 상속자인 필리프 에게 시집보냈다. 사실 이전에 프랑스 왕가는 부르고뉴 공작 가문과 오를레앙 공작 가문 둘과 통혼을 했었다. 이자보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도팽 루이와 장 상 푀르의 딸이 결혼을 했고, 이자보의 장녀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였던 이자벨이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의 후계자인 샤를과 결혼했었다. 하지만 이자보가 부르고뉴 공작과의 평화를 위해 미셸을 시집보낼때 아버지의 암살로 오를레앙 공작이 된 샤를은 첫 아내인 이자벨을 잃게 된다. 이것은 이자보의 상황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오를레앙 공작 가문에서는 한발자국 멀어지고 반면 부르고뉴 공작 가문에는 한발자국 가까워진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이자보가 부르고뉴 공작파를 좀더 우호적으로 대한 것은 당연한 것일수도 있다. 1409년 당시 딸인 이자벨은 사망했으며, 오를레앙 공작파는 샤를이 있긴 했지만 강력한 지도자는 없었다. 반면 부르고뉴 공작 파는 강력한 공작인 부르고뉴 공작 장 상 푀르가 버티고 있었기에 누가봐도 어느편에 서야할지는 명확해 보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자보의 궁극적 목적은 많은 왕가의 어머니들처럼 안전한 나라를 아들에게 물려주려하는 것일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녀는 중재자의 역할을 지속해야했지만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어느 한편과 손을 잡을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410년 오를레앙 공작은 강력한 귀족중 한명이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인 본 다르마냑과 재혼했다 이 사건은 야심가이며 강력한 지도자 인상을 주고 있던 아르마냑 백작이 이제 오를레앙 공작 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아내는 샤를 6세의 사촌이었던 베리의 본으로 이런 연결 고리는 국왕의 숙부이자 파리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던 베리 공작 마저도 어느정도 끌어들일수가 있게 되었다.


오를레앙 공작 샤를과 본 다르마냑의 결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시 한번 부르고뉴 공작파와 오를레앙-아르마냑 파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이자보와 이제 어느정도 성장해서 정치에 관여할수 있게 된 도팽 루이는 여전히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 두 세력간의 갈등은 봉합될수 없는 것이었으며 1411년 드디어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이라고 불리게 되는 내전이 시작된다.


그림&자료출처

앞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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