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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11. 2019

난 꼭 1837년 5월 24일까지는 살거야!

가벼운 역사이야기 : 영국의 윌리엄 4세의 맹세

빅토리아 여왕이 어린 시절 그녀는 매우 고립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인 켄트 공작은 여왕이 어린시절 사망했으며, 여왕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 빅토리아는 영국에 익숙하지 않았었다. 두번째 과부가 된 켄트 공작부인은 사람도 낯설고 언어도 낯설며 심지어 남편도 없는 영국보다는 고향인 독일로 돌아가고 싶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딸은 중요한 왕위계승후보자였고 이런 계승후보자가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영국 내에서 용납할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딸인 빅토리아와 함께 있는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이렇게 억지로 영국에 살게 된 켄트 공작부인은 사실 영국 왕가에 불만이 많았다. 그녀는 공작부인이었으며 왕위계승자의 어머니였지만 그녀가 원하는만큼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영국 의회가 박대한 면이 없지 않아있었는데 딸이 추정왕위계승자였음에도 여전히 남편의 빚에 시달리고 있었고 모자라는 돈은 동생인 벨기에 국왕이 영국 의회에서 받는 연금으로 충당해주기까지 했었다.(켄트 공작부인의 동생인 벨기에의 레오폴 1세는 원래 조지 4세의 딸인 샬럿의 남편이었고 샬럿이 죽은 뒤에도 살렷의 남편이었다는 자격으로 얼마간의 연금을 영국 의회로부터 받고 있었다.)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게다가 켄트 공작부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남편의 비서였던 존 콘로이를 무척이나 신임했었다. 존 콘로이는 야심가로, 특히 빅토리아가 미성년으로 왕위에 오를 경우 당연히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이 섭정이 될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켄트 공작부인을 자신의 영향력아래 두고서 조정하려했고 심지어 빅토리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시도를 했다. 그는 켄트 공작부인에게 딸을 독립적으로 두지 말라고 했고 어머니에게 의존하게 만들려고 했다. 자신의 자녀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공주와 친분을 쌓지 못하게 막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독립적 성격이었던 빅토리아는 이 상황에 매우 치를 떨었으며, 특히 존 콘로이와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에 대한 적대심이 극에 달할정도였다고 한다.


존 콘로이


이런 상황은 점차 켄트 공작 부인과 빅토리아는 물론 켄트 공작부인과 영국 왕실과의 거리를 멀게 만드는 것이었다. 영국 왕가에서는 섭정이 되고 싶어하는 켄트 공작부인과 그녀를 조종하는 존 콘로이를 대놓고 싫어했으며, 켄트 공작부인은 자신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의지도 되지 않았던 영국 왕가에 대해서 역시 싫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윌리엄 4세가 대놓고 자신은 빅토리아가 섭정이 필요없는 18살이 되는 1837년 5월 24일까지는 살것이라고 떠들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한번 켄트 공작부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기도 했다.


윌리엄 4세


그리고 윌리엄 4세는 자신의 말대로 빅토리아가 18살로 법적으로 섭정이 필요없는 성인의 나이가 된 다음달인 1837년 6월 20일 사망했다. 그리고 성인으로 섭정이 필요없는 나이였던 빅토리아는 이제 여왕이 되면서 자신을 억압하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과 그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존 콘로이의 간섭을 더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커닝햄 경과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 백부 윌리엄 4세의 부고를 듣는 빅토리아 여왕,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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