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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18. 2019

이 여인에게 돌 좀 덜 던져!!!(3)

가벼운 역사 이야기 : 바이에른의 이자보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은 프랑스 내의 상황을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사실 부르고뉴 공작이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했을때 오를레앙(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 파는 이미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넌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자보와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겨우 겨우 미봉책으로 상처를 덮어놓고 있었을뿐이었던것이다.


두 세력은 치열하게 대립했고 결국 이런 상황은 이자보와 그녀의 아들인 도팽 루이가 계속해서 중재의 노력을 했음에도 아무소용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싸움에 어부지리로 이익을 얻는 이가 있었다. 바로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는 부르고뉴 공작의 동맹이었기에 헨리 4세는 부르고뉴 공작의 도움 요청을 외면하지 않았다. 물론 대신 댓가를 받았다. 더 재미난것은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 세력을 등에 업자 아르마냑 측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잉글랜드를 막기 위해 역시나 댓가를 제공했고 결국 잉글랜드만 이익을 얻는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1413년 이자보는 물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상황을 완전히 뒤바꿀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먼저 부르고뉴 공작이 파리에서쫓겨나고 아르마냑파가 파리를 점령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전에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했었던 이자보의 입장을 바꾸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도팽 루이는 어머니의 영향력아래 있긴했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영향력아래에도 있었기에 오를레앙 공작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이 문제는 좀 껄끄럽게 발전하게 된다. 결국 1414년 이자보가 아르마냑파와의 조약을 통해서 아르마냑파를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바다 건너 잉글랜드에서 일어났다. 바로 잉글랜드의 헨리 4세가 사망하고 헨리 5세가 즉위한 것이었다. 그는 강력한 군주로 잉글랜드를 평정한 상황에서 이제 바다건너의 프랑스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부르고뉴 공작은 오래도록 잉글랜드의 동맹이었지만 헨리 5세의 거침없는 주장에 위협을 느낄정도였다고 한다. 헨리 5세의 과감한주장에 프랑스가 테니스공을 보내서 조롱했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믿을수는 없지만 어쨌든간에  1415년 헨리 5세는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한다.


잉글랜드의 헨리 5세, 그는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지만 장인보다 몇달 일찍 죽어서 프랑스 국왕이 된적은 없습니다.


잉글랜드의 침공에 이제 권력의 중심을 잡은 아르마냑 파는 잉글랜드와 맞써기로 한다. 비록 부르고뉴파 역시 여전히 아르마냑파와 반감을 가지고 있긴했지만 외적을 대비하는 문제는 다른 것이었고 역시 많은 부르고뉴파가 여기에 가담했다. 비록 부르고뉴 공작 장 상 푀르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의 두동생들은 모두 참전했다.

그리고 1415년 10월 역사에 남을 전투인 아쟁쿠르 전투가 시작되었다.결과는 프랑스의 대패였다. 많은 핵심 귀족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작의 두동생들 모두 전사했고,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힐정도였다.


아쟁쿠르 전투


하지만 프랑스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 비록 헨리 5세는 직접 파리를 공격하지 않고 일단 노르망디를 장악하러 갔지만 프랑스 내부에서는 다시 한번 권력투쟁이 시작된것이었다. 아쟁쿠르 전투 직후 도팽 루이가 사망한다. 그가 죽은뒤 동생인 장이 도팽이 되지만 그는 장인의 영향력아래있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장인은 부르고뉴 공작의 누이와 결혼햇었기에 당연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했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이 파리에 입성해야한다고 주장했었지만 국왕 샤를 6세는 이를 반대했고 아르마냑 백작을 파리로 불러들였고 아르마냑 백작은 여전히 부르고뉴 공작과 화해하지 않을것을 강력하게 내비치게 된다.


이 상황은 이자보에게도 유리하지 않았는데 먼저 그녀는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둘다의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 사이를 오가며 협정을 맺었었고 이것은 두세력이 모두 그녀를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들인 장을 거의 만나지도 못했기에 다른 수단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은 의외로 빨리 끝나게 되는데 1417년 장이 사망하게 되면서였다. 장이 죽자 이제 도팽의 지위는 이자보의 막내아들인 샤를에게 돌아가게 된다. 문제는 장이 부르고뉴 공작의 영향력아래 있던 사람인것처럼 샤를은 아르마냑파의 영향력아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확고한 아르마냑파였으며 어머니인 이자보를 부르고뉴파로 보고 적대적인 행동을 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1417년 벵센에서 이자보의 신하였던 루이 보르동을 "문란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이자보를 연금한것이었다. 아르마냑파는 아마도 이자보를 완전히 부르고뉴 공작파로 여겼을 것이며 그녀를 연금하므로써 도팽인 샤를 외에 섭정의 권한을 주장할수 없게 만드려고 했던 것일듯하다.


하지만 결국 이런 모든 일은 결국 점점더 프랑스에 파국을 맞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료&그림출처

앞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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