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Feb 25. 2019

이 여인에게 돌 좀 덜 던져!!!!(4)

가벼운 역사 이야기 : 바이에른의 이자보- 마지막

도팽 샤를의 행동은 이자보에게 큰 위협을 느끼게 했으며 결국 그녀는 처음으로 스스로 한 세력에 손을 내밀게 된다. 이전까지 그녀는 권력을 잡은쪽과 계속 평화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샤를과 아르마냑 파의 행동은 이제 이자보도 더이상 물러설곳이 없다고 느꼈던듯하다.그녀는 부르고뉴 공작이 내미는 손을 덥석잡았으며 이제 그녀는 단독으로 자신의 섭정 권한을 강력히 주장하게 된다. 권력투쟁은 부모 자식간에도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이번 싸움의 시작은 확실히 샤를이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샤를 7세


아르마냑파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자보가 강력하게 섭정권한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샤를은 도팽이 되었을뿐 섭정이 되지는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 역시 다시 기회를 얻었기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장악했다. 그는 이제 프랑스의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릴 기회가 되었으며 당연히 자기네들끼리 치고받고 있는 프랑스 상황에 흡족했을 것이다.


다시 외적의 위협이 증대되자, 아르마냑-부르고뉴 사이에서는 잠시 평화를 이야기해야할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그리고 둘은 서로 협상을 시작하자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자보는 이때까지도 낭만적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비록 부르고뉴 공작과 한편이 되었지만 결국 샤를은 그녀의 아들이었으며 남편의 유일한 계승자이기도 했다. 이 평화가 성립된다면 그녀는 다시 아들과 잘 지내려고 노력했을수도 있을 것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장 상 푀르


하지만 이 모든것은 1419년 11월 결말을 맞이한다.

평화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도팽과 부르고뉴 공작은 만났지만 이 만남과정에서 도팽의 측근이 부르고뉴 공작을 공격해서 살해해버린것이었다. 양측 군대는 서로 강을 마주보고 있었고 다리 중간에서 만났었는데 이 사건이후 도팽과 그들은 강건너로 도주해버렸다.


부르고뉴 공작의 죽음


부르고뉴 공작의 살해는 정말 무책임한 일이었는데 국왕과 왕비 모두가 부르고뉴 공작 손안에 있었음에도 그를 살해하고 뒷감당도 하지 않고 도망가버린것은 도팽 샤를이 정말 상황을 제대로 볼 능력이 있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이기까지 하다. 당연히 부르고뉴 공작 장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뒤를 이은 필리프 "선량공"은 강을 한번더 건너버리게 된다. 그는 바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고 이제 도팽 샤를이 계승하게 될 프랑스 왕가와 완전히 등을 올리기로 결심하게 된것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선량공", 마리 드 부르고뉴의 할아버지


이 상황은 이자보나 광기에 사로잡혀있던 샤를 6세에게도 매우 난처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부르고뉴 공작의 손안에 있었기에 아무런 일을 할수도 없었다. 또 평화조약을 위해서 만난 상황에서 암살을 진행한것이야말로 현대에도 좋게 볼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상황은 도팽 샤를의 계승권 박탈로 이어지게 된다. 샤를 6세와 이자보에게는 사실상 선택지가 없었다. 부르고뉴 공작은 절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상위 군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으며 그들 손안에 있는 국왕 부부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평화 조약에 따라서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공주가 잉글랜드의 국왕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에는 왕위계승자가 없었으며 부르고뉴 공작은 골치아픈 왕위계승문제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불구대천의 원수인 도팽 샤를을 왕위계승자로 인정하기는 죽어도 원치 않았다. 결국 원만한 해결 방법은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5세의 주장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프랑스는 평온해지고, 부르고뉴 공작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상위군주로 섬기지 않아도 되고, 샤를 6세와 이자보는 어쨌든 평온한 삶을 누릴수 있을 것이었다.


트루아 조약에서의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


아마도 이자보가 트루아 조약에 동의한 가장 큰것은 아마도 그녀가 더이상 정치에 관여할 힘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오랜시간동안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불운한 왕비로 지내왔다. 그리고 이런식의 종말은 그녀에게 어쨌든 안식을 줄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뭐 잉글랜드 국왕은 그녀의 사위였으며 그뒤에 계승자는 그녀의 후손이기도 했었다.


트루아 조약이후 이자보의 삶은 조용하고 평온하게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묻힌것이 아니었다.


이자보의 장례식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샤를 7세가 힘을 얻자 이제 잉글랜드측에서 이자보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자보 생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자보의 죽음뒤에 이자보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 -특히 부정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퍼지게 된다. 이것은 샤를 7세의 정통성을 부정하므로써 프랑스 국왕으로 대관하기까지한 헨리 6세의 통치 권한을 정당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후 시대에도 이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후손이 아니라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후손들이 프랑스 왕위를 잇게 되기 때문이었다. 루이 12세나 프랑수아 1세는 모두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후손으로 당연히 이자보가 부정한 여성이었고 그녀의 아들이 적자가 아니라면 자신들의 왕위계승의 정당성이 더 확고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도 했다.


이후 국가 개념이 확고히 성립되면서 이자보의 악명은 더욱더 심해지게 된다. 나라를 구한 잔다르크에 대비되는 나라를 팔아먹은 여성으로 대비되는 것이었다. 이 둘은 여성이었기에 대비효과가 극대화되었다. 또 외국인 왕비에 대한 거부감 역시 이자보의 악명을 더 부채질하게 만든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방하던 시기 이자보에 대한 이야기도 덩달아 더 자세히 알려지게 된다. 


대관식을 위해 파리로 입성하는 이자보 왕비, 이자보의 삶에서 정점을 찍었던 시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비난을 받을수 있다. 하지만 바이에른의 이자보가 받는 비난은 사실 그녀 단독으로 받을 것이 아니라 나라를 망쳤던 부르고뉴 공작들, 오를레앙 공작들, 아르마냑 백작, 그리고 이들을 추종한 수많은 신하들과 마지막으로 어머니와도 권력투쟁에 서슴치 않고 나섰던 샤를 7세에게도 똑같이 돌아가야할것이다. 



자료&그림출처

앞쪽과 동일 

매거진의 이전글 이 여인에게 돌 좀 덜 던져!!!(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