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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pr 22. 2019

내 아버지는 마부라고~~!!

가벼운 역사 이야기 : 프랑스 대혁명 중 어느 왕족이야기

이 이야기는 앞쪽에 "사람일은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된다!!https://brunch.co.kr/@elara1020/505"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사실 혁명 초기에는 공화정보다는 국왕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었었죠. 하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정을 희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귀족들과 특권층들 그리고 왕족들에게까지도 고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게 됩니다.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이 된 사건


특히 1792년과 1793년 사이 많은 귀족 출신의 장군들이 프랑스의 적국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했고, 프랑스의 위기상황이 격화되면서 동시에 공포정치가 극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귀족이거나 아니면 귀족에 가까운 특권을 누렸던 많은 이들이 무자비한 탄압을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되죠.


많은 이들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당했는데 특히 귀족 출신의 사람들은 아무리 혁명을 지지했어도 수많은 사람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했고 결국은 단두대로 가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사람 역시 이런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했고 결국 단두대로 가야했던 인물입니다.


오를레앙 공작 가문은 루이 14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후손으로 프랑스 왕가의 제1 방계 왕가입니다.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이 단절된다면 프랑스 왕위를 이을 계승권을 가지게 되는 가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당시 공작이었던 루이 필리프 2세 도를레앙으로 앞의 이야기에서 나왔던 루이 필리프 1세와 그의 아내인 루이즈 앙리에트 드 부르봉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루이 필리프2세 도를레앙, 필리프 에갈리테, 샤르트르 공작 시절, 오를레앙 공작의 후계자에게는 샤르트르 공작 칭호가 부여됩니다.


루이 필리프 2세는 혁명 당시 많은 귀족들처럼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이때문에 대혁명초기에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혁명은 점점 더 폭력성을 띠게 되었으며 많은 귀족들이나 왕족들은 살기 위해서 도피해야만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루이 필리프 2세도 안전을 걱정하게 되었고 이에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인 1792년 9월 학살사건이 일어난뒤 (이 학살사건에서는 오를레앙 공작부인의 올케였던 랑발공비가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시신이 훼손되었으며 그녀의 잘린 목은 장대에 걸쳐져서 탕플에 갇혀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여줬었다고 합니다.) 그는 성을 "에갈리테"라고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때문에 이후 그는 자주 "필리프 에갈리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하죠.


랑발 공비의 죽음,1907년 작품


하지만 귀족이나 왕족들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더 커졌으며, 오를레앙 공작인 "필리프 에갈리테"는 자신의 출생마저도 바꾸려합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온 궁정이 다 알던 유명한 스캔들 메이커였던 것과 그의 할아버지가 그를 오를레앙 가문 사람으로 인정하려하지 않았던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가 바람을 피웠던 집안 마부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었냐구요?

물론 믿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필리프 에갈리테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와 너무나 닮아서였다고 합니다.


더하기 하나

이런 필리프 에갈리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당합니다. 그의 아들인 샤르트르 공작은 뒤무리에와 함께 도망쳐서 망명했으며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게된 원인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부정하다가 결국 아들때문에 죽게 된것이죠. 그의 아들인 샤르트르 공작 루이 필리프는 후에 프랑스로 돌아왔고 결국은 프랑스의 국왕 루이 필리프이 되긴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프랑스 왕위계승요구자인 파리 백작은 필리프 에갈리테의 후손입니다.

더하기 둘

필리프 에갈리테의 주장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불신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후손들이 프랑스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느냐에 대한 쑥덕거림으로 이어지게 되죠. 하지만 요즘은 좋은 기술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유전자 분석기술말입니다. 부계로 이어지는 Y 염색체 분석결과 필리프 에갈리테의 후손들은 루이 13세의 후손이 맞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것은 결국 필리프 에갈리테가 그렇게나 아버지를 닮은 이유가 확인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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