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과 권력을 공유하다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6) 알폰수 1세의 딸 테레사

by 엘아라

이베리아 반도는 오래도록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한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8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침입한 뒤 처음으로 세워진 기독교계 국가였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도 왕위에 대한 여성의 계승권리를 인정한 듯한 사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역시 성립때부터 여성의 계승권리를 통해서 영지를 얻었기에 아마도 남성후계자가 없을 경우 여성이 왕위계승권리를 물려받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는 바로 포르투갈의 초대국왕이라고 여겨지는 아폰수 1세의 자녀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1169년 아폰수 1세는 전투중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이 상처는 그의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됩니다. 상처가 점차 악화 되었으며 아폰수 1세 상태는 매우 악화됩니다. 결국 1172년에는 결국 섭정을 세워야할 정도가 되죠. 섭정의 문제는 복잡했는데 아폰수 1세에게는 세명의 적자와 한명의 서자가 있었습니다. 세적자중 장녀인 우라카는 당시 레온의 왕비였기에 포르투갈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인 테레사와 산초가 남아있었죠. 하지만 이들은 이때 20대초반, 10대 후반이었습니다. 반면 아폰수 1세의 서자 아들이었던 페르난도 아폰수는 이복 동생들보다 20살 가량 많았습니다. 이것은 복잡한 상황을 낳는데 누가봐도 나이 어린 이복동생이 나이 많은 이복형을 제압하는 것을 무리로 보였을 것입니다.


1172년 처음에 아폰수 1세의 두 아들인 페르난도 아폰수와 산초가 섭정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자와 적자를 동등한 지위로 보는 것이라 인정할수 없는 상황이 되죠. 아마도 이런 상황은 갈등상황을 연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자의 지위를 더 높게 인정하기 위해서 테레사가 등장합니다. 여성 상속자였지만 적자였던 테레사가 당연히 서자인 페르난도 아폰수보다 더 높은 지위로 남동생인 산초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인정을 받게 된것이죠. 그리고 1173년 아폰수 1세의 섭정으로 산초와테레사가 등장합니다. 당연히 페르난도 아폰수는 섭정의 지위에서 밀려나게 된것이었습니다. 산초와 테레사는 각각 일을 분담했는데 산초는 군사적인 일을 담당했으며 테레사는 행정업무를 담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여성의 계승권"은 "남성의 계승권"만큼이나 동일하며 적어도 서자인 아들보다 적자인 딸의 왕위계승권리가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합니다.


더하기

테레사는 자신의 포르투갈 계승권리때문에 오래도록 혼담이 지체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베리아 반도쪽 귀족들이나 왕족들과 결혼할 경우 포르투갈 계승권리때문에 불이익을 당할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테레사는 당대에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대에 플랑드르 백작과 결혼했습니다. 후계자를 원했던 플랑드르 백작은 정치적 문제 등때문에 테레사와 결혼했지만 후계자를 얻지 못합니다. 이후 그녀는 부르고뉴 공작과 재혼했지만 역시 둘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에 결국 결혼을 무효로 돌린후 플랑드르로 돌아가서 지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족보를 마구 꼬아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