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것인가?

가벼운 역사이야기 :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와 보스웰 백작

by 엘아라

정치적 목적이었든지 열정이었던지 간에 단리경과 결혼한 메리여왕은 곧 남편의 단점을 알게 됩니다. 그는 당연히 여왕의 권리를 자신의 권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왕인 메리가 군주였지만 자신역시 그런 권리를 누려야한다고 생각했었죠. 이것은 메리의 신하들에게 매우 나쁘게 받아들여졌으며 메리 역시 그를 신뢰할수 없게 됩니다. 결국 단리경은 스코틀랜드에서 고립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단리경과 메리 여왕


하지만 결혼 얼마뒤 메리는 임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리경에게 아마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쨌든 여왕의 후계자가 될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더 많은 권한을 누려야한다고 여겼을 것이죠. 물론 아내인 메리 여왕이나 여왕의 측근들은 생각이 달랐었습니다. 결국 이런 불만은 큰 사고를 불러일으킵니다. 단리경과 그의 친구들은 임신 육개월인 여왕앞에서 여왕이 총애하던 신하이자 개인 비서였던 데이비드 리치오를 살해한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 개인비서가 여왕의 아이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돌았었기에 격분해서 죽인것이라고 이야기가 있기도 했으며, 자신을 홀대하는 여왕에 대한 불만으로 죽인것이라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리치오의 죽음, 19세기


이 사건은 메리 여왕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습니다. 남편이 불만이 있었던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를 살해했다는 것에 대해서 메리는 더이상 남편을 신뢰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아이가 태어날때까지는 참아야했었을 것입니다. 태어날 아이의 출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것이었는데, 임신한 자신 앞에서 사람도 죽이는 남편이 그런짓을 안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1566년 6월 메리 여왕은 아들인 제임스를 낳았고 이제 후계자 문제는 매우 확고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부부사이는 더욱더 멀어지게 되죠. 가장 큰 원인은 단리경이 원하던 지위를 메리가 여전히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아마도 메리가 여전히 남편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듯했을 것입니다.


단리경


하지만 이런 불화는 1567년 2월 갑작스럽게 끝납니다. 왜냐면 단리경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메리 여왕과 단리경은 이때 에든버러로 갔는데 여왕이 잠시 집에 없는 동안 집에 갑작스러운 폭발과 화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단리경이 사망했죠. 이 이야기만 보면 단순한 사고사같이 보이지만 문제는 단리경의 시신이 집안이 아니라 집 밖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사가 아닐수 있다는 것이었죠.


곧 이에 대해서 용의자가 떠오르게 됩니다. 바로 보스웰 백작이었던 제임스 햅번과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남편과 불화를 빚던 메리 여왕이었습니다. 보스웰 백작은 야심가였는데다가, 여왕은 그에게 호의적이었죠. 심지어 여왕과 그가 모종의 관계라는 소문마저 돌 정도였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사고가 일어나던날 여왕은 집에 없었던 것도 여왕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왕이 보스웰 백작과 함께 공모해서 남편을 죽였다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는데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이런 생각을 완전히 굳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보스웰 백작 제임스 햅번


먼저 모두들 보스웰 백작이 단리경을 살해한 것이라고 여겼었으며, 단리경의 아버지인 레녹스 백작은 여왕에게 보스웰 백작의 재판을 요구합니다. 여왕은 승락했지만 이를 자꾸 증거가 없다면서 자꾸 연기했고 결국 1567년 4월 12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죠.


단리경의 죽음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 맨앞이 아들인 제임스 6세이고 뒤가 부모인 레녹스백작 부부 그리고 동생인 찰스 입니다.


4월 말경 메리는 에든버러를 떠나서 아들인 제임스를 만나러 갑니다. (왕가의 아이들은 보통 부모와 떨어져서 양육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메리는 보스웰 백작에게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5월 초에 메리는 에든버러로 돌아오게 되죠. 이후 여왕은 명예를 위해서 보스웰 백작과 결혼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보스웰 백작 역시 메리가 에든버러로 돌아가기전 아내와 이혼했으며, 5월 15일 서둘러 여왕과 결혼하죠.


이것은 모두에게 경악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에는 이런식으로 결혼을 하는 경우가 좀 있었습니다. 보호자가 없는 높은 지위의 여성이 재산이나 지위 때문에 납치당해서 결혼을 하는 경우가 종종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메리나 보스웰 백작의 상황은 이런 결혼이 납득이 될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보스웰 백작은 메리의 남편인 단리경의 살해 용의자로 떠올랐던 사람인데 아무리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또 아무리 명예가 달린 일이라도 이런 남자와 결혼하는것은 이미 메리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상황은 사람들이 메리가 보스웰 백작과 공모해서 사이가 나쁜 남편을 죽였다는 의심을 확신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했었죠.


메리 여왕


사실 메리는 보스웰 백작과 결혼한것에 사람들이 지지할것이라고 여겼었다고 합니다. 단리경은 너무나 인기가 없었던 반면 보스웰 백작은 지지세력이 많은 인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누가봐도 충격적이었고 비난을 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여왕과 보스웰 백작에 반대해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내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결국 여왕과 보스웰 백작은 이들에게 굴복하게 됩니다. 보스웰 백작은 도망쳤으며, 여왕은 살인과 간통혐의로 갇히게 됩니다. 이때 여왕은 쌍둥이 아이를 유산했으며 아이를 유산한 직후 한살밖에 안된 아들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양위해야만했습니다.


메리 여왕과 아들 제임스 6세, 사실 메리는 아들이 한살때 이후 평생 만나지 못했습니다.


메리와 보스웰 백작의 행동에 대해서는 보스웰 백작이 여왕의 남편자리를 욕심내서 여왕을 납치했다는 이야기와 여왕이 이미 보스웰과 교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어쩌면 납치나 결혼은 메리의 의지가 아니었을수 있습니다. 과부가 된 메리가 납치당한후 임신했기에 어쩔수 없이 결혼했을수도 있죠. 하지만 이 상황은 메리가 어쩔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보스웰과 적극적으로 함께 했다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 충분한것이기도 했습니다. 오비이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진다는 의미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 인과관계로 보일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메리와 보스웰 백작의 일은 과연 오이비락이었을까요?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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