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이야기 : 쉬플링겐부르크의 게르트루트
11세기말 12세기초 유럽은 매우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졌었습니다. 특히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이 중부 유럽 전체의 패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죠.
하인리히 10세의 경우 장인인 황제 로타르 2세(또는 3세)에게 매우 충성을 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 그를 견제했었습니다. 특히 장인으로부터 작센 공작령을 아버지로부터 바이에른 공작령을 상속받았으며 장인인 황제 로타르 2세는 사위에게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스폴렛토 지역마저 주었었죠.
하지만 로타르 2세가 죽고 독일의 국왕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콘라트 3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하인리히 10세는 장인이 죽었을때 자신이 황제 지위에 오르려했었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견제가 막심했었기에 결국 콘라트3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당연히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하인리히 10세를 콘라트 3세가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콘라트 3세는 하인리히 10세의 상위군주였기에 그의 영지인 바이에른 공작령, 작센 공작령, 토스카나 마르크그라프령과 스폴레토 공작령을 모두 뺏아서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줘버리게 되죠.
당연히 하인리히 10세는 반발했었으며 작센 공작령을 본거지로 삼아서 콘라트의 세력을 쫓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바이에른으로 진격하다가 1139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죠. 하인리히 10세에게는 어린 아들인 하인리히(하인리히 데어 뢰베, 사자공 하인리히)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하인리히 데어 뢰베는 어린아이였기에 자신의 영지를 되찾는 것은 힘들었으며 작센 지역만을 겨우 방어하게 됩니다.
하인리히 10세의 아내이자 황제 로타르 2세의 딸이었던 게르트루트는 아들의 섭정으로 작센지역에서 계속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콘라트 3세와 콘라트로부터 작센의 공작령을 받은 브란덴부르크의 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의 공격이 남아있었죠.
결국 이 문제는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려하게 됩니다. 게르트루트의 어머니이자 황후였던 리헨차는 아마 독일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그녀가 딸과 외손자를 위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협상을 할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결국 1142년 하인리히 10세와 게르트루트의 아들인 하인리히가 작센의 공작령에 대한 상속을 인정받게 됩니다. 대신 게르트루트는 콘라트 3세가 바이에른 공작령을 부여했던 오스트리아의 하인리히 2세와 결혼하기로 하죠. 하인리히 2세는 콘라트 3세의 이부동생이었기에 비록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아니었지만 이 결혼은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의 평화 협정을 위한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인리히 데어 뢰베가 바이에른 공작령에 대한 상속도 주장할수 있는 위치인것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결혼은 작센 공작령을 인정해주는 대신 바이에른 공작령을 넘기는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게르트루트는 작센 공작령의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만약 그녀의 아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녀의 남편이 작센 공작령을 차지할 명분까지 생기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게르트루트는 아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공작과 결혼했을 듯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