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의 정부
랭카스터 공작부인인 콘스탄사는 영어를 거의 몰랐고, 랭카스터 공작은 카탈루냐어를 잘하지 못했었습니다. 게다가 콘스탄사는 자신의 주변에 고향에서 온 식솔들을 데리고 있었고 이런 외국인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다른 주변 인물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었죠. 결국 콘스탄사는 기존의 랭카스터 공작의 궁정사람들과 교류가 적었으며,랭카스터 공작의 궁정을 주도하는 인물은 랭카스터 공작의 정부이자 가문의 오랜 식솔이었던 캐서린 스윈포드가 됩니다.
캐서린은 공식적으로는 랭카스터 공작부인의 식솔로 랭카스터 공작의 자녀들을 돌보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서 랭카스터 공작과 블랜치의 자녀들은 대체적으로 캐서린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은 랭카스터 공작부인에게 봉사하기 보다는 랭카스터 공작의 정부로 화려한 생활의 중심에 살았습니다. 캐서린은 공작의 아이를 네 명을 낳았으며, 그녀의 친인척들은 랭카스터 공작의 영향력 아래 살아갔죠. 캐서린의 동생인 필리파는 랭카스터 공작부인의 시녀였으며, 필리파의 남편인 초서는 랭카스터 공작의 후원 아래 확고한 지위를 얻었습니다.
랭카스터 공작은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매우 사랑했는데, 아이들에게는 "보퍼트"라는 성을 줬습니다. 보퍼트는 프랑스의 영지로 랭카스터 공작의 적자들의 상속권을 침해할 염려가 없었다고 합니다.
캐서린과 랭카스터 공작의 첫 번째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존 보퍼트로 늘 랭카스터 공작이 가장 사랑한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헨리로 후에 추기경이 됩니다. 셋째아들은 토마스로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습니다. 딸인 조앤은 두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결혼으로 웨스트모어랜드 백작부인이 되고, 그녀의 딸인 시슬리 네빌은 요크 공작부인, 손자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킹메이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랭카스터 공작과 캐서린은 9년 정도 함께 살지만 결국 둘의 사이는 끝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죠.
에드워드 3세 치세 말이 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 (일명 흑태자)가 어린 아들 리처드만 두고 사망했습니다. 이 때문에 정치적 권력은 왕국에서 웨일즈 공 다음 서열이었던 랭카스터 공작에게 집중되죠. 또 다른 문제는 에드워드 3세의 정부였던 앨리스 페러즈 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그 결과 앨리스 페러즈는 매우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그녀는 국왕에게서 경제적인 것을 많이 얻어냈는데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반발을 샀었습니다. 하지만 국왕 다음의 권력자였던 랭카스터 공작은 앨리스 페러즈에게 대항하지 않고 그녀는 용인해줌으로써 많은 이들의 원성을 사게 됩니다. 결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훌륭한 귀족이라는 평가였던 랭카스터 공작은 이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캐서린 역시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에드워드 3세가 죽고 그의 장손인 리처드가 즉위하면서 권력은 좀 더 미묘해지기 시작합니다. 리처드가 즉위한 시기는 잉글랜드 사회가 격변하던 시기중 하나였습니다. 흑사병과 백 년 전쟁은 잉글랜드 사회의 구조를 뒤흔들었으며 이것은 결국 1381년 '농민 발란(일명 와트 타일러의 난)으로 이어지게 되죠.
세금 문제로 촉발된 이 사건은 반란군들이 런던으로 왔으며 런던의 왕족들과 귀족들 성직자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간신히 목숨을 구하는데 캐서린 스윈포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권력자 중 한 명이었던 랭카스터 공작은 표적이었으며 랭카스터 공작의 런던 거주지였던 사보이궁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캐서린은 아이들과 랭카스터 공작의 딸인 필리파와 함께 간신히 도망쳤습니다만 이 사건은 그녀가 랭카스터 공작과 이별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