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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25. 2015

중세의 스캔들 : 캐서린 스윈포드의 삶(7)

 공작부인

1394년 잉글랜드 왕가에서는 세명의 왕실 여성들이 사망하게 됩니다. 첫 번째가 3월에 랭카스터 공작부인이 사망했으며, 6월에는 리처드 2세의 왕비인 보헤미아의 앤이 페스트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7월에는 랭카스터 공작의 며느리인 더비 백작부인이 막내 아이를 낳은 뒤 산욕열로 사망합니다.

랭카스터 공작은 아키텐에 있다가 아내의 죽음을 알고 돌아왔으며 아내의 장례를 치른 직후 며느리의 장례도 치러야 했습니다. 더비 백작부인의 식솔 이었던 캐서린 역시 메리 드 분이 사망할 때 곁에 있었을 것입니다. 장례를 치른 뒤 공작은 다시 아키텐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아들인 존 보퍼트를 데려갑니다.



리처드2세로부터 아키텐 공작 지위를 부여받는 랭카스터 공작



아마 공작은 아키텐으로 가면서 캐서린과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듯합니다. 이제 둘은 나이가 지긋했지만 여전히 서로를 흠모했었으며,  또 자녀들의 문제도 있었죠. 늘 아이들을 고려했던 랭카스터 공작이 보퍼트 가문의 아이들이 서자로 남아있을 경우 받을 불이익을 고민했을 것입니다.


아키텐에서 돌아온 뒤, 1396년 1월 공작은 조카인 국왕에게 캐서린과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연대기에서는 국왕이 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반응했다고 묘사하지만 어쨌든 그는 결혼을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국왕의 허락이 떨어진 뒤 바로 캐서린과 결혼합니다. 이제 캐서린은 랭카스터 공작부인이 되었으며, 왕비가 없는 잉글랜드에서 잠시 동안 제일 높은 신분의 여성이 되었죠.

캐서린은 4월에 랭카스터 공작부인으로 궁정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거의 대부분의 궁정 사람들이 경악을 했었습니다. 캐서린은 왕자와 결혼할만한 신분의 여성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공작의 정부였던 여성이었죠. 많은 이들이 공작이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고 여겼으며, 글로스터 공작부인은 캐서린을 "sister"라고 결코 부르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둘의 결혼을 교황이 허락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국왕인 리처드 2세는 늘 캐서린에게 호의적이었으며 숙부와 결혼한 캐서린을 공작부인으로 바로 인정해줬다고 합니다.


캐서린은 공작부인으로써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왕실의 중요 행사에 남편과 함께 참석했는데 1396년 리처드 2세가 재혼할 때 남편과 함께 그의 왕비를 맞으러 국왕과 함께 동행했었죠. 캐서린은 남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생의 마지막을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보내게 되죠.



이사벨 드 발루아를 맞이하는 리처드 2세와 궁정 사람들



그녀는 어린 이사벨라 왕비와 가깝게 지냈는데 아마도 그녀가  어린아이를 자주 돌봤었기 때문에 겨우 여섯 살의 나이로 결혼한 어린 이사벨라 왕비에 대해서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듯합니다.


부모가 결혼하고 교황의 정식 승인이 난 뒤, 보퍼트 가문의 아이들의 운 역시 펴지기 시작합니다. 장남인 존은 국왕에 의해서 서머셋 백작이 되었으며, 헨리는 이제 고위 성직자가 될 길이 열리게 되죠. 과부가 된 조앤은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 중 한 명이었던 랄프 네빌과 결혼하죠. 막내인 토마스 역시 기사이자 고위 귀족이 될 길이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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