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의 어머니
랭카스터 공작부인으로써 캐서린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남편인 랭카스터 공작의 애정도 한몸에 받았죠. 하지만 랭카스터 공작의 건강이나 주변 정치 상황은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리처드 2세는 강력한 귀족들이었던 숙부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랭카스터 공작은 형인 흑태자에게 조카를 돌볼 것이라 맹세했고 기사로써 이 맹세를 충실히 수행했었고, 리처드 역시 이를 알고 있었을듯합니다. 하지만 공작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헨리는 달랐죠.
더비 백작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볼링브룩의 헨리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아들이었습니다. 뛰어난 기사이자 군인 었는데 이런 사촌에게 국왕인 리처드 2세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능숙한 인물이었던 리처드는 랭카스터 공작의 상속자를 멀리 떼어놓으려 했고 결국 성공합니다. 헨리는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으며 늙고 이제 병들어 가던 랭카스터 공작은 아들과 떨어진 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캐서린은 남편 곁에서 남편의 걱정을 이해하고 함께 고민했었을듯합니다. 비록 리처드나 리처드의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헨리를 어린 시절부터 돌봐왔었던 캐서린 역시 헨리의 처지에 대해서 무척이나 걱정했을듯합니다.
1399년 2월 랭카스터 공작은 사망합니다. 이때 곁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캐서린과 아들인 헨리 보퍼트 밖에 없었습니다. 공작의 장례식은 공작의 손자인 11살의 먼마우스의 헨리(후에 헨리 5세)가 프랑스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참석했었습니다. 공작은 늘 사랑했었던 첫 번째 아내 랭카스터의 블랜치 곁에 묻혔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캐서린은 조용한 삶을 원합니다. 그녀는 과부로 자신의 오랜 삶의 기반이었던 링컨셔로 돌아가죠. 아들인 토마스 스윈포드는 어머니를 위해 집을 구해줬으며 캐서린은 그곳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과부가 된 뒤의 캐서린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지만 아마도 평생을 알았고 오래도록 사랑했었던 남자를 잃은 캐서린은 조용히 남편을 기리면서 살길 원했을듯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캐서린의 아이들과 랭카스터 가문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리처드 2세는 보퍼트 가문의 자녀들에게 좋은 대접을 했지만, 라이벌이었던 랭카스터 공작의 후계자인 헨리에 대해서는 적대적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에 헨리는 프랑스에서 돌아왔으며, 보퍼트 가문 자녀들은 이복 형인 헨리를 지지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리처드 2세를 지지했었던 존 보퍼트 역시 비밀리에 편지를 이복형에게 보냈을 정도라고 합니다. 조앤 보퍼트의 남편이자 강력한 귀족 중 한 명이었던 랄프 네빌은 적극적으로 헨리를 지지했죠. 결국 헨리는 리처드를 몰아내고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헨리가 즉위한 뒤 그는 캐서린에 대해서 자신의 의붓어머니라고 인정해줍니다. 사실 헨리는 어린 시절부터 캐서린이 돌봤으며 어머니 블랜치의 기억을 공유하고 자신을 양육했었던 캐서린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죠. 그는 국왕이 된 뒤 캐서린을 "the king's mother"이라고 표현했으며 정기적으로 선물을 보냈습니다.
헨리는 아버지가 캐서린에게 남긴 유산을 승인해줬으며 이 때문에 캐서린은 매우 부유한 여성이 됩니다. 그녀가 그 재산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의 묘에 그녀가 vowess로 살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vowess는 수녀와 비슷하지만 수녀원에 들어가지 않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여성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으로 봐서 캐서린은 호화로운 생활보다는 조용히 살면서 자선사업 등을 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졌지만 캐서린은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한발 떨어져 지냈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 캐서린 역시 쇠약해져 갔죠. 그리고 1403년 캐서린은 링컨셔에서 사망했으며 링컨 성당에 묻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