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어린 시절
안토니오 비발디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사계"를 떠올릴 것입니다. 1725년 발간된 이 바이올린 곡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곡이기도 하죠. 많은 이들이 사계라는 이름 때문에 안토니오 비발디라는 이름을 알고 있지만 반면 그의 수많은 다른 작품들이나 복잡했었던 그의 사적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사계를 제외한 비발디의 다른 음악작품들은 20세기 중반 이후까지도 거의 알려져있지 않았으며 20세기 말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많이 알려지게 됩니다. 사실상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이브"에서 비발디 에디션을 발매한 것도 비발디에 대해 사람들이 좀 더 폭넓게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된듯합니다.
안토니오 루치아노 비발디는 1678년 3월 4일 베네치아에서 악기 연주자인 지오바니 바티스타 비발디와 그의 아내인 카밀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당일 산파가 세례를 줬다으며 두 달 후인 1678년 5월 6일 교회에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발디가 태어난 직후 세례를 받은 것은 당시에 지진이 일어났고 그 때문에 급박하게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비발디가 태어난 날 베네치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비발디가 태어난 당일 급하게 세례를 받은 것은 그만큼 허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일듯합니다. 아마도 아이가 태어난 직후에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 여겼고 그 때문에 급하게 세례를 준 것이었죠. 실제로 비발디는 평생 병약함으로 고통받았으며 건강 때문에 사제로써 "성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고 알려져있기도 합니다.
비발디의 아버지인 지오바니 바티스타 비발디는 원래 베네치아 출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지오바니가 10살 무렵 베네치아로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오바니는 이발사로써의 기술과 바이올린을 동시에 배웠다고 합니다. 현재는 두 직업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당시에는 손으로 하는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둘을 비슷하게 봤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지오바니는 이발사로써는 소질이 없었던지 전문 음악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지오바니는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으며 바이올린 강사로 고용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비발디가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듯합니다.
안토니오 비발디는 아버지 지오바니 비발디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으며, 이때 아버지와 같이 살았었습니다. 지오바니 비발디는 안토니오 비발디가 죽기 오 년 전에 사망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했었죠. 또 아버지는 아들의 여행 등에 동행했었으며, 비발디가 음악 감독으로 일할 때 그의 일을 도왔으며 아들의 악보를 베껴주던 일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비발디는 생애 대부분을 가족과 함께 지냈는데 특히 사제가 되기 위해 수련하던 때 조차도 수도원에 들어가기 보다는 가족과 함께 머물 때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가족들을 매우 가깝게 만들었는데 비발디는 누이들과도 잘 지냈으며 결국 이런 음악가족의 분위기는 비발디의 조카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조카들 중 세명이 악보 복사가로 일했다고 합니다.
비발디의 가족들은 아마도 재능 있는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돌아갔을듯합니다. 비발디의 음악은 전 유럽에 알려졌으며 수많은 후원자들이 비발디에게 모여들었죠. 이런 비발디에게 많은 부와 명예가 돌아왔고 가족들은 이런 비발디가 자유롭게 작곡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료출처
http://www.antonio-vivaldi.eu/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