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나오는 피가로의 부모가 왜 결혼을 할수 없었을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모차르트가 빈에서 무대에 올린 오페라로 원작은 1770년대 무대에 올려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프랑스의 보마르셰의 연극인 피가로의 결혼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원작의 내용은 당대 흔들리던 신분제 사회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특히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에서 환호를 받았었기에 요주의 작품으로 프랑스 외에서 무대에 올리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빈에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수가 없었기에 대본가였던 로렌초 다 폰테는 정치적인 요인이 될만한 모든 대사를 다 바꾸었고 황제의 검열을 통과한뒤 연주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당대 인기는 물론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작품중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이 됩니다.
이 오페라에서 제일 재미난 파트는 바로 3막에서 피가로가 억지로 결혼하지 않기위해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이때 피가로에게 결혼을 압박하던 마르첼리나가 피가로의 신세를 드다가 갑자기 "라파엘로"를 외치면서 내가 너의 엄마야~~를 외치고, 더불어 바르톨로를 가리키면서 너의 아버지야~~를 외치는 장면일 것입니다. 나중에 아들을 되찾자 바르톨로는 기뻐하면서 마르첼리나와 결혼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웃기지만, 신분제 사회였던 당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피가로의 부모인 마르첼리나와 바르톨로는 당대 신분이 차이나던 사람으로 바르톨로는 중산층인 "의사"였고 마르첼리나는 그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기에 둘은 결혼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가로는 납치됐을때 화려한 옷을 입고 부잣집 자녀였다고 주장했으며 바르톨로와 마르첼리나 역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것에 기뻐했고, 바르톨로는 결국 마르첼리나와 결혼까지 하는 것을 보면 둘은 피가로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가족으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당대에는 이런 상황이 꽤나 자주 있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상황에 있었던 사람들은 여러명이었습니다. 그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18세기 영국 정치가였던 에드워드 월폴과 그와 평생 함께 살았던 도로시 클레멘틴이라는 여성이 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 월폴의 아버지는 조지 1세와 조지 2세 시절에 수상으로 영국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로버트월폴이었습니다. 영국은 오래도록 장자상속제였기에 로버트 월폴의 백작 지위는 에드워드의 형에게 돌아갔지만 에드워드 월폴 역시 강력한 월폴 가문의 일원으로 정치가로 살았습니다.
그는 미혼으로 지냈는데 대신 자신의 하녀였던 도로시 클레멘틴이라는 여성과 평생 함께 살면서 네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도로시 클레멘틴은 중고 의류점에서 일하던 여성으로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이런 그녀를 본 에드워드 월폴은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와 함께 살면서 아이들을 낳았었습니다.
사실 당대 영국은 다른 유럽지역보다 훨씬 신분제도에 대해서 너그러운 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귀족이 귀족이 아닌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어느정도 용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그러웠다고 하지만 신분제도의 구별이 있었는데 특히 고용인과 고용을 하는 사람간의 신분은 분명히 구별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에드워드 월폴은 사회적 지위와 체면때문에 하녀와 결혼할수 없었고 그냥 함께 살기만 했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 월폴의 네명의 자녀들은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기에 모두 "사생아"신분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당대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월폴 가문은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컸으며 이 때문에 에드워드 월폴의 네 명의 자녀들은 모두 월폴 가문 사람들로 인정받았으며 특히 세명의 딸들은 궁정에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남자들과 결혼했습니다. 에드워드 월폴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의 둘째딸인 마리아 월폴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 월폴은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이때문에 오래도록 미혼으로 지냈던 발드그레이브 백작 제임스 발드그레이브가 사랑에 빠져서 그녀와 결혼하길 원했습니다. 사실 사생아였기에 발드그레이브 백작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월폴이 유명해진것은 발드그레이브 백작과 결혼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 월폴은 결혼후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명의 딸을 낳았습니다만 마리아 월폴보다 20살 넘게 나이가 많았던 발드그레이브 백작은 1763년 결혼 4년만에 사망합니다. 결혼이후 사교계 명사로 널리 알려져있었던 마리아 월폴은 남편이 죽은뒤 여러 사람들과 교제를 했는데 그중에는 조지 3세의 동생이었던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이었던 윌리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과부인 백작부인과 미혼인 왕자가 교제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771년 조지 3세와 헨리의 동생이었던 컴벌랜드 공작 헨리가 영국 출신의 과부였던 앤 호튼과 결혼해버리면서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조지 3세는 동생들이 독일식으로 통치가문 출신의 여성과 동등한 결혼을 하길 원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아버지가 귀족이 되었다고 하지만 앤 호튼을 제수로 받아들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화를 내면서 결혼을 무효화 시키려했고 결국 1772년 국왕의 허락없이 왕족들이 결혼할수 없다는 왕실 법령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글로스터 공작은 1766년에 마리아 월폴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것은 조지 3세가 대노하는 일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조지 3세는 동생들을 이혼시키려했지만 "귀천상혼"제도가 없었던 영국에서는 공작들의 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되는 것이었고, 게다가 둘의 결혼은 모두 1772년 결혼 법령을 발표하기 이전에 진행되었기에 앤 호튼과 마리아 월폴은 왕실 공작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 월폴의 이야기는 물론 둘의 부모이야기도 널리 알려진것입니다.
귀천상혼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던 영국에서 조차도 신분이 다른 사람들과의 결혼에 대해서 엄격히 거부했었기에 당연히 더 엄격한 신분제도를 적용하고 있던 유럽 대륙에서는 신분이 달라서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헤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대구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20주년 기념으로 시즌 오페라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4월 주말 내내 토스카,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4월 23일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립니다. 물론 검열로 삭제되긴했지만, 극 자체에 이미 흔들리는 신분제도에 대해서 묘사가 들어가고 있는 이 오페라를 한번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림출처
1.위키 미디어 커먼스
2.대구 오페라하우스